Section4-나와다른사람-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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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페이지의 구성
CHAPTER 01
💭 들어가며 — 나는 너를 몇 퍼센트나 아는가
📌 이 장의 핵심
▸ 자녀들은 부모가 자기를 잘 모른다고 느끼지만, 부모는 대개 자녀를 90퍼센트 이상 안다고 여깁니다.
▸ 이 어긋남은 친구·연인, 심지어 나와 나 자신 사이에도 있습니다.
피카소가 한 사람을 여러 시점에서 보아야 한다고 가르쳤다면, 이번 섹션은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아무리 여러 시점에서 보아도 끝내 다 알 수 없는 사람,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입니다. 지식채널e 〈나와 다른 사람〉을 비롯한 여러 텍스트를 실마리로 삼아, '타자(他者)'라는 큰 주제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먼저 교실에서 했던 작은 조사를 소개합니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몇 퍼센트나 안다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부모님은 여러분을 몇 퍼센트나 안다고 생각합니까?" 답이 제각각이었습니다. 은찬은 "저는 저를 70퍼센트, 부모님도 저를 70퍼센트쯤 아는 것 같아요"라고 했습니다. 희철은 더 잘게 쪼갰습니다. "저는 저를 45퍼센트, 엄마는 저를 60퍼센트, 그런데 엄마는 자기 자신을 40퍼센트밖에 모르는 것 같아요." 윤재는 "부모님은 저를 10퍼센트 정도 알아요"라고 했고, 어떤 학생은 "5퍼센트요"라고까지 했습니다.
여기서 묘한 비대칭이 보입니다. 자녀들은 부모가 자기를 잘 모른다고 느끼는데, 정작 부모 세대에게 물어보면 대다수가 "나는 우리 아이를 90퍼센트 이상 안다"고 답합니다. 한쪽은 "당신은 나를 모른다"고 하고, 다른 쪽은 "나는 너를 다 안다"고 합니다.
같은 두 사람 사이에 이렇게 큰 간격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 간격은 부모-자녀 사이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친한 친구 사이에도, 오래된 연인 사이에도, 심지어 나와 나 자신 사이에도 비슷한 간격이 있습니다. 누가 맞을까요? 이 어긋남이 이번 섹션의 출발점입니다.
🤔 핵심 질문
나는 가장 가까운 사람을 몇 퍼센트나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CHAPTER 02
📌 1. 레비나스 — 타자는 이해할 수 없기에 존중해야 한다
📌 이 장의 핵심
▸ 레비나스에 따르면 타자는 끝내 이해되지 않기에 존중해야 합니다.
▸ 각자가 하나의 우주라고 인정하는 순간 생기는 조심스러움이 곧 존중입니다.
▸ 차별과 따돌림은 상대를 '다 안다'고 납작하게 만든 뒤에 일어납니다.
🔑 타자(他者)
나 아닌 다른 사람, 내 개념에 다 담기지 않는 존재
🔑 전체화
남을 내 머릿속 틀에 욱여넣어 다 파악했다고 여기는 것 — 레비나스가 본 폭력의 뿌리
리투아니아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활동한 20세기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타자(他者, autrui)'를 평생의 주제로 삼았습니다. 타자란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뜻합니다. 레비나스의 주장을 한 문장으로 줄이면 이렇습니다. 타자는 끝내 이해되지 않기에 존중해야 한다. 미리 밝혀 두겠습니다.
이 문장은 그의 책에 그대로 실린 글귀가 아니라 제가 취지를 눌러 담아 만든 요약입니다. 레비나스 자신의 말은 훨씬 까다롭습니다. 그는 주저 『전체성과 무한』(1961)에서, 타인의 얼굴은 내가 가진 어떤 개념에도 담기지 않고 오히려 그 개념을 넘쳐흐른다고 썼습니다. 남을 내 머릿속 틀에 욱여넣어 '다 파악했다'고 여기는 짓을 그는 '전체화'라 부르며 폭력의 뿌리로 지목했습니다.
보통 우리는 거꾸로 생각합니다. "상대를 이해해야 존중할 수 있다"고요. 그런데 레비나스는 뒤집습니다. 사실 우리는 타인을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의 마음에는 본인조차 다 알지 못하는 무의식의 영역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도 다 모르는데, 하물며 남을 어떻게 다 알겠습니까. 그러니 "나는 저 사람을 다 안다"는 말은 거의 언제나 착각입니다.
레비나스는 여기서 아름다운 결론을 끌어냅니다. 타인을 다 알 수 없다는 것은 절망할 일이 아니라 존중할 이유라는 것입니다. 각자가 하나의 우주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 안에는 그가 살아온 모든 시간, 겪은 모든 슬픔과 기쁨, 본인도 모르는 깊이가 우주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그 우주를 내가 손바닥 보듯 다 안다고 여기는 순간, 나는 그를 함부로 다루기 시작합니다. 반대로 "저 사람은 내가 다 헤아릴 수 없는 하나의 우주"라고 인정하는 순간, 나는 그 앞에서 조심스러워집니다. 그 조심스러움이 바로 존중입니다.
이 발상을 뒤집어 보면 더 또렷해집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함부로 대할 때를 떠올려 보세요. 대개 "쟤는 뻔해", "그 사람은 원래 그래"라고 단정한 다음입니다. 상대를 한 줄로 요약해 버리는 순간, 그는 사람이 아니라 꼬리표가 됩니다. 차별도, 따돌림도, 폭력도 모두 상대를 '다 안다'고 납작하게 만든 뒤에 일어납니다. 그러니 레비나스의 말은 추상적인 윤리 강령이 아니라 아주 실용적인 예방주사입니다.
"나는 저 사람을 다 알지 못한다"는 한 마디가, 함부로 대하려는 마음에 제동을 겁니다. 섹션 3의 입체파를 다시 떠올려 보세요. 한 사람을 정면 한 장면으로만 그리지 않고 여러 면을 겹쳐 보려는 그 태도가, 곧 '상대를 우주로 대하는' 레비나스의 태도입니다. 피카소의 그림과 레비나스의 철학이 같은 곳을 가리키고 있었던 셈입니다.
CHAPTER 03
🔄 2. 빙산과 90퍼센트의 착각 — 왜 많이 안다고 여길수록 위험한가
📌 이 장의 핵심
▸ 빙산 비유는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를 보여 주는 교육용 그림이며, 숫자는 측정값이 아닙니다.
▸ 많이 안다고 생각할수록 상대를 조종하려는 욕심이 커집니다.
▸ 다 알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 사랑의 시작입니다.
앞의 조사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90퍼센트 이상 안다"고 여기는 것은 왜 위험할까요? 여기서 무의식의 '빙산' 비유를 빌려 오겠습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빙산을 본 적이 있을 겁니다. 물 위로 솟은 부분은 거대해 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전체의 작은 끝자락일 뿐입니다. 빙산의 대부분은 물 아래에 잠겨 있습니다. 타이태닉호가 침몰한 것도, 물 위에 보이는 빙산만 피하면 된다고 여겼다가 물 아래 거대한 얼음에 부딪혔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꼭 이 빙산 같다고들 말합니다. 물 위에 드러난 부분 — 우리가 의식하는 마음 — 은 작은 끝자락이고, 물 아래 잠긴 부분 — 우리가 무의식이라 부르는 것 — 이 훨씬 크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는 짚고 가야 합니다. 이 빙산 그림은 흔히 프로이트가 그린 것처럼 소개되지만, 정작 프로이트의 저작 어디에도 빙산 도해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의 이론을 쉽게 가르치려고 뒷사람들이 만들어 붙인 그림이고, '의식 10퍼센트, 무의식 90퍼센트'라는 숫자도 무엇을 재어서 얻은 값이 아닙니다.
그러니 이 비유는 마음의 지도를 정확히 그린 설계도가 아니라,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눈에 보이게 만든 교육용 그림으로 받아들이는 편이 정직합니다. 숫자를 걷어 내도 요점은 조금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내가 왜 그 사람에게 끌리는지, 왜 그 말에 그토록 화가 났는지 정작 나도 다 설명하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 — 그 경험 하나만으로도 물 아래의 존재는 충분히 증명됩니다.
그런데 부모가 자녀를 90퍼센트 안다고 믿는다면, 이것은 물 위로 드러난 얼음 끝자락만 보고 그것이 빙산 전부라고 우기는 것과 같습니다. 더 무서운 것은 그다음입니다. 많이 안다고 생각할수록 조종하려는 욕심이 커집니다. "내가 너를 잘 아니까 너는 이렇게 살아야 해"라는 말이 거기서 나옵니다.
섹션 2에서 본 중2병 학생의 "엄마가 뭘 알아요"라는 외침을 떠올려 보세요. 그것은 무례한 반항이기 이전에, 부모의 '90퍼센트 착각'이 처음으로 정면에서 깨지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자녀가 부모의 시야 밖에 있는 자기만의 우주를 처음으로 주장하는 사건인 것입니다.
이 비대칭을 섹션 4 들어가며 본 조사가 잘 보여 줍니다. 자녀들은 부모가 자기를 잘 모른다고 느끼는데(윤재는 10퍼센트, 어떤 학생은 5퍼센트), 부모는 자녀를 90퍼센트 이상 안다고 여깁니다. 누가 맞을까요? 여기서 희철의 답이 가장 정직합니다. "저는 저를 45퍼센트밖에 모르고, 엄마는 자기 자신조차 40퍼센트밖에 모르는 것 같아요." 자기 자신도 절반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남을 90퍼센트나 알 수 있겠습니까. 희철은 열일곱 살에 빙산의 진실을 제 힘으로 더듬은 셈입니다.
그러니 자녀를 잘 키우는 첫걸음은 "나는 내 아이를 다 안다"는 믿음을 내려놓는 데 있습니다. 섹션 2에서 제가 8년 끝에 도달한 결론 — "자녀도 타인이고, 받아들이는 방법은 전면적 수용뿐"이라는 말 — 이 레비나스의 타자론과 정확히 같은 자리에 서 있습니다. 다 알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사랑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이 진실은 부모-자녀 사이에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친구도, 연인도, 선생님도, 나아가 나 자신도 —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조차 끝내 다 알 수 없는 빙산입니다. 이 사실을 무겁게 받아들이면 외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볍게 받아들이면 자유로워집니다. 누구도 나를 완전히 알 수 없다는 것은, 내가 언제든 나를 새로 써 나갈 여백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CHAPTER 04
📌 3. 환대 — 낯선 이를 손님으로 맞는다는 것
📌 이 장의 핵심
▸ 환대는 낯선 이를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기뻐하며 손님으로 맞이하는 태도입니다.
▸ 칸트는 환대를 평화의 조건으로 삼아 자발적인 평화 연방을 구상했습니다.
▸ 『침묵의 함대』는 평화를 힘으로 강요할 수 있는가를 묻습니다.
🔑 환대(歡待)
낯선 이·이방인을 기뻐하며 손님으로 맞아들이는 태도
타자를 존중하는 태도가 사회의 차원으로 커지면 '환대(歡待, hospitality)'가 됩니다. 환대란 낯선 이, 이방인, 손님을 따뜻하게 맞아들이는 태도입니다. '환대'의 '환(歡)'은 기뻐한다는 뜻입니다. 낯선 이를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손님이 온 것을 기뻐하며 맞이한다는 뜻이 글자 안에 담겨 있습니다. 철학자 칸트는 이 환대를 단순한 미덕을 넘어 법의 자리로 끌어올렸습니다. 그는 1795년에 낸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 — 우리말로는 흔히 『영구평화론』으로 옮깁니다 — 에서 평화의 조건을 조약문처럼 조항으로 나누어 적었습니다.
예비 조항에서는 상비군을 때가 되는 대로 완전히 없앨 것을 요구했고, 확정 조항에서는 세 가지를 내걸었습니다. 각 나라의 정치 체제가 공화정일 것, 자유로운 나라들이 평화를 위한 연방을 이룰 것, 그리고 세계시민의 권리는 '보편적 환대'의 조건에 한정될 것입니다.
여기서 칸트가 말한 환대는 낯선 이가 다른 나라 땅에 닿았을 때 적으로 취급받지 않을 권리, 곧 찾아갈 권리였지 눌러살 권리는 아니었습니다. 손님으로 맞아 달라는 최소한의 요구였던 셈입니다. 이 연방 구상은 훗날 국제연맹, 그리고 오늘날의 국제연합(UN)으로 이어졌고, 유럽연합(EU)의 사상적 뿌리 가운데 하나로 꼽힙니다.
칸트의 통찰을 거칠게 옮기면 이렇습니다. 진짜 평화는 각국이 무기를 더 많이 쌓아서 오는 것이 아니라, 무기를 앞세울 까닭 자체를 줄이는 약속의 그물을 함께 짤 때 온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오해는 여기서 걷어 두겠습니다. 칸트는 세계 단일 정부를 세워 각국 군대를 그 아래 두자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강제 국가는 도리어 거대한 전제 정치로 굳는다고 그는 경계했습니다. 그가 그린 것은 주권을 지닌 나라들이 스스로 맺고 언제든 다시 확인하는 느슨한 평화 연방이었습니다. 낯선 나라를 적이 아니라 손님으로 맞이하는 환대의 윤리를, 국제 질서의 설계 원리로 삼자는 제안입니다.
이 발상을 대담하게 그려 낸 작품이 가와구치 가이지가 1988년부터 1996년까지 연재한 만화 『침묵의 함대』입니다. 일본과 미국이 비밀리에 함께 만든 원자력 잠수함 '시배트'를 함장 가이에다 시로가 탈취해 독립국 '야마토'를 선언하고, 그 힘을 발판 삼아 국제연합 아래 초국가 군대를 두자고 세계에 제안합니다.
한 나라가 쥔 가장 강력한 무기를 인류 공동의 기구에 맡기자는 이 발상은, 칸트가 200년도 더 전에 그린 평화 연방의 꿈을 훨씬 과격한 형태로 다시 묻습니다. 다만 두 그림은 결정적으로 갈립니다. 칸트는 강제 없이 자발적으로 맺는 연방을 말했는데, 이 만화의 함장은 압도적인 무력으로 세계를 협상 테이블에 끌어냅니다. 평화를 힘으로 강요할 수 있는가 — 만화가 던지는 진짜 물음은 그것입니다.
🤔 핵심 질문
평화는 힘으로 강요할 수 있는가?
CHAPTER 05
📌 4. 두 갈래의 사랑 — 합류적 사랑과 존재 양식의 사랑
📌 이 장의 핵심
▸ 기든스의 합류적 사랑은 두 강물처럼 함께 흐르다 갈라지고 다시 만날 수도 있는 열린 관계입니다.
▸ 프롬에게 사랑은 받는 능력이 아니라 익혀서 하는 능동적인 기술입니다.
▸ 사랑에서 바꾸려 들면 안 되는 것은 상대이고, 바꿀 수 있는 것은 나 자신입니다.
🔑 합류적 사랑
영원한 합일의 강박 없이 함께 흐르는 열린 관계(기든스)
🔑 사랑의 기술
상대가 그 사람답게 자라도록 돌보는, 익혀야 하는 능동적 능력(프롬)
타자를 대하는 태도가 가장 뜨겁게 시험받는 자리가 사랑입니다. 섹션 2의 연애 인터뷰를 이제 철학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영국의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는 1992년에 낸 『친밀성의 구조 변동』에서 '합류적 사랑(confluent love)'이라는 개념을 내놓았습니다. 'confluent'는 라틴어로 '함께'를 뜻하는 con과 '흐르다'를 뜻하는 fluere가 합쳐진 말입니다. 두 줄기 강물이 만나 한동안 함께 흐르다가, 다시 갈라질 수도 있고 또 만날 수도 있는 — 그런 열린 관계가 합류적 사랑입니다. 영원히 하나로 합쳐져야 한다는 강박이 없습니다.
이것을 옛이야기 속 사랑과 견줘 보면 차이가 또렷합니다. 동화는 대개 "그래서 둘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납니다. 두 사람이 하나가 되어 변치 않고 산다는 것입니다. 듣기엔 아름답지만, 현실의 사람은 강물처럼 끊임없이 변합니다. 변하지 않는 하나 됨을 약속하는 사랑은, 상대가 변하는 순간 배신감을 느낍니다. 반면 합류적 사랑은 처음부터 "우리는 함께 흐르는 두 강물"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상대가 변해도 그것을 배신이 아니라 흐름으로 받아들입니다. 섹션 2의 준서를 떠올려 보세요.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 "이제 다 포기했어요, 그냥 이해해요"라고 말한 준서야말로 합류적 사랑의 모범입니다. 자기 고집을 내려놓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흐르게 두는 사랑입니다. 헤어졌다 다시 만난 그 곡선조차, 두 강물이 갈라졌다 다시 합류한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던 셈입니다.
정신분석학자이자 사회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1956년에 낸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에서 사랑을 '소유'가 아니라 '존재의 방식'으로 보았습니다. 프롬에 따르면 사랑은 무엇보다 능동적인 활동입니다. 그는 사랑이란 무언가에 '빠지는 것(falling for)'이 아니라 그 안에 '서 있는 것(standing in)'이라고 못 박았습니다. 아래에 이어지는 설명은 그의 논지를 우리말로 간추린 것이지, 원문을 그대로 옮긴 인용이 아님을 밝혀 둡니다. 우리는 흔히 "사랑받고 싶다"고 말하며 사랑을 받는 것으로 여깁니다.
마치 누군가 나타나 나를 사랑해 주기를 기다리는 것처럼요. 그러나 프롬은 그 생각을 뒤집습니다. 사랑은 받는 능력이 아니라 하는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림을 잘 그리려면 그리는 법을 익혀야 하듯, 사랑도 하는 법을 익혀야 하는 하나의 기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책 제목이 '사랑의 기술'입니다. 상대를 내 것으로 만들어 붙잡아 두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그 사람답게 자라도록 돌보는 능력 — 그것이 익혀야 할 기술입니다. 섹션 2의 경태가 "내 주장만 하면 안 된다, 입장을 바꿔 생각한다"며 자기를 고친 것이 바로 이 기술을 배워 가는 과정입니다.
그렇다면 흔히 말하는 '완전한 하나 됨', 곧 낭만적 사랑의 완전한 합일은 어떨까요? 레비나스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나도 하나의 우주이고 상대도 하나의 우주인데, 두 우주가 완전히 합쳐질 수 있겠어요? 완전한 합일은 소설에서나 가능합니다."
차갑게 들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랑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라, 합쳐질 수 없는 두 우주가 서로를 존중하며 나란히 흐르는 것 — 그것이 현실의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다 알 수 없는 상대를 다 알려고 들지 않으면서도 곁에 머무는 것, 그것이 가장 어렵고 가장 깊은 사랑입니다.
여기서 섹션 2의 두 갈래 태도를 다시 저울에 올려 보겠습니다. 기범과 홍민은 "사람은 고쳐 쓰는 물건이 아니다"라며 안 맞으면 끊는 길을 택했습니다. 준서와 경태는 받아들이고 자기를 고치는 길을 택했습니다. 어느 쪽이 옳을까요? 사실 두 태도는 같은 진실의 다른 얼굴입니다.
기범의 말은 '상대를 내 뜻대로 바꾸려 들지 말라'는 뜻에서 옳습니다. 상대를 고치려는 마음은 그를 도구로 다루는 것이고, 레비나스가 경계한 '다 안다는 착각'에서 나옵니다. 한편 경태의 길은 '상대를 바꾸려는 대신 나를 돌아본다'는 뜻에서 옳습니다. 그가 고친 것은 상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그러니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사랑에서 바꾸려 들면 안 되는 것은 상대이고, 바꿀 수 있는 것은 나 자신입니다. 상대를 고쳐 쓰려는 마음은 폭력이 되기 쉽고, 나를 돌아보는 마음은 성숙이 됩니다. 기범의 통찰과 경태의 통찰을 한데 모으면, '상대는 받아들이고 나는 돌아본다'는 한 문장이 됩니다. 이것이 두 우주가 나란히 흐르는 합류적 사랑의 실제 방법입니다.
🤔 핵심 질문
상대를 고치려는 마음과 나를 돌아보는 마음은 어떻게 다른가?
CHAPTER 06
📌 5. 나는 누구인가 — 테세우스의 배와 기억의 릴레이
📌 이 장의 핵심
▸ 테세우스의 배는 부품의 연속만으로는 '같은 것'을 판가름할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 세포가 바뀌어도 나를 나로 이어 주는 바통은 기억입니다.
▸ '나'는 고정된 명사라기보다 기억과 관계로 새로 엮이는 동사에 가깝습니다.
🔑 자기동일성(identity)
나를 어제의 나와 같은 사람으로 이어 주는 성질
타자를 한참 이야기했으니, 이제 그 거울인 '나'로 돌아오겠습니다. 무엇이 나를 나이게 할까요? 평소엔 너무 당연해서 물어본 적도 없는 질문입니다. "내가 나지, 그게 뭐가 문제야?" 싶습니다. 그런데 한번 진지하게 따져 보면 의외로 답하기 어렵습니다. 내 이름이 나일까요? 이름은 바꿀 수 있습니다.
내 몸이 나일까요? 몸은 끊임없이 바뀝니다. 내 성격이 나일까요? 성격도 세월 따라 변합니다. 그렇다면 그 모든 게 바뀌어도 끝까지 남아 '나'를 나이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것을 철학에서는 '자기동일성(identity)'이라고 부릅니다. 나를 어제의 나와 같은 사람으로 이어 주는 성질입니다.
여기 오래된 사고실험이 있습니다. '테세우스의 배'입니다. 플루타르코스가 『영웅전』의 〈테세우스〉 편에 적어 둔 이야기에서 시작합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영웅 테세우스가 타고 돌아온 배를 기념물로 오래 보존하면서, 낡은 널빤지를 하나씩 새것으로 갈아 끼웠습니다. 세월이 흘러 모든 부품이 교체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배는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일까요, 아니면 다른 배일까요? 답하기 쉽지 않습니다.
여기에 한 가지 비틀기를 더해 보면 더 어려워집니다. 17세기 철학자 토머스 홉스가 『물체론』(1655)에서 덧붙인 물음입니다. 누군가 갈아 낸 낡은 널빤지를 모두 모아 두었다가 그대로 다시 조립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진짜 테세우스의 배는, 새 부품으로 계속 항해 중인 배일까요, 아니면 옛 부품으로 새로 조립된 배일까요? 머리가 핑 돕니다. 한 척이 두 척이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부품의 연속만으로는 '같은 것'을 판가름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물음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몸의 세포는 끊임없이 죽고 새로 만들어집니다. 장 점막의 세포는 며칠, 적혈구는 넉 달, 지방 세포는 여러 해에 한 번씩 갈립니다. 스웨덴 연구진이 1950~60년대 핵실험으로 대기에 퍼졌던 방사성 탄소를 표지 삼아 사람 세포의 나이를 되짚어 잰 연구(스팔딩 외, 2005)가 이 사실을 정밀하게 보여 주었습니다. 다만 같은 연구는 '몇 년이면 몸이 통째로 새것이 된다'는 통설도 함께 무너뜨렸습니다.
대뇌 겉질의 신경세포는 태어난 뒤로 거의 새로 만들어지지 않아 그 사람과 나이가 같고, 눈 수정체 중심부의 단백질과 심장 근육세포의 상당수도 평생을 함께 갑니다. 몸의 많은 부분은 바뀌지만 전부가 바뀌지는 않는다는 것 — 지금까지 확인된 사실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래도 물음은 남습니다. 여러분의 몸을 이루는 물질의 상당 부분은 어린 시절의 그것과 이미 다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신을 같은 사람이라고 느낍니다. 무엇이 그렇게 이어 줄까요?
답은 기억입니다. 부품이 다 바뀐 테세우스의 배가 같은 배일 수 있는 것은, 그 배에 얽힌 연속된 기억과 이야기가 끊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포가 다 바뀌어도 어제의 기억이 오늘로, 오늘의 기억이 내일로 이어지는 한 '나'는 계속됩니다. 마치 400미터 계주에서 주자가 바뀌어도 바통이 끊기지 않고 이어지듯, 기억이라는 바통이 나를 나로 이어 줍니다. 그래서 끝내 나를 증명하는 것은 몸이 아니라 뇌, 더 정확히는 뇌에 담긴 기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생각을 끝까지 밀어 보면 무거운 물음이 따라옵니다. 만약 사고로 기억을 모두 잃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여전히 같은 사람일까요? 몸은 그대로인데 기억이라는 바통이 끊겼습니다. 거꾸로, 어떤 사람의 기억을 고스란히 복사해 다른 몸에 옮겨 심을 수 있다면, 그 몸은 원래의 그 사람일까요? 답하기 어렵습니다. 이 어려움 자체가 중요합니다. '나'라는 것이 우리가 평소 믿는 것처럼 단단한 알맹이가 아니라, 기억과 관계로 매 순간 새로 엮이는 이야기에 가깝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고정된 명사라기보다 계속되는 동사에 가깝습니다.
여기서 작은 위로를 하나 건네고 싶습니다. 정체성이 고정된 알맹이가 아니라 이어지는 이야기라면, 지금의 내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몸을 이루는 물질이 해마다 조금씩 갈리듯, 사람도 자기 이야기를 다시 써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섹션 2의 경태가 "내 주장만 하면 안 된다"며 자기를 고친 것이 그 증거입니다. 나를 나이게 하는 것이 기억이라면, 앞으로 어떤 기억을 쌓아 갈지를 고르는 것은 지금의 나입니다.
CHAPTER 07
📌 6. 나는 어디에 있는가 — 공각기동대와 뉴럴링크
📌 이 장의 핵심
▸ 『공각기동대』와 뉴럴링크는 기억을 몸 밖으로 옮길 수 있다면 '나'는 어디 있는가를 묻습니다.
▸ 기술은 '할 수 있는가'를 묻지만, '해도 되는가'는 기술이 답해 주지 않습니다.
기억이 나를 나이게 한다면, 무서운 물음이 따라옵니다. 그 기억을 몸 밖으로 옮길 수 있다면, '나'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시로 마사무네가 1989년에 그린 만화 『공각기동대』, 그리고 오시이 마모루가 1995년에 만든 같은 제목의 애니메이션은 이 물음을 정면으로 던집니다. 2017년 실사 영화에서는 스칼렛 요한슨이 주인공 구사나기 모토코를 연기했습니다. 작품 속 세계에서 사람들은 뇌를 전자화한 '전뇌'와 기계로 만든 몸 '의체'를 쓰고, 의식의 알맹이에 해당하는 것을 '고스트'라 부릅니다. 몸을 통째로 바꿔도 고스트가 이어지면 같은 사람이라는 설정입니다.
한 가지 덧붙이면, 이 작품은 고스트를 완벽하게 복사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스트를 옮겨 복제하면 원본이 손상되고 사본은 눈에 띄게 열화한다는 설정을 두어, '나를 그대로 두 벌 만들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손쉬운 답을 주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네트워크 안에 떠 있는 그 데이터도 '나'일까요? 몸이 죽어도 고스트가 서버에 살아 있다면 나는 죽은 걸까요, 산 걸까요?
공상 같던 이 물음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일론 머스크의 회사 뉴럴링크는 두개골에 동전 크기의 장치를 심고 머리카락보다 가는 전극 실을 뇌에 꽂아, 뇌의 전기 신호만으로 컴퓨터 커서를 조종하는 임상 시험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2024년 1월 사고로 사지가 마비된 노랜드 아르보가 첫 이식을 받아 생각만으로 체스를 두고 전략 게임을 했고, 같은 해 8월 두 번째 참가자 '알렉스' — 역시 척수 손상으로 사지가 마비된 사람입니다 — 는 이식 하루 만에 커서로 총싸움 게임을 하고 이튿날에는 설계 프로그램으로 부품을 그렸습니다. 이 분야는 갱신이 매우 빠릅니다. 여러분이 이 글을 읽는 시점에는 참가자 수도 성능도 여기 적힌 것보다 훨씬 앞서 있을 테니, 최신 소식은 직접 찾아 확인해 보기 바랍니다. 뇌와 기계가 직접 연결되는 시대가 코앞입니다.
잠깐 사고실험을 해 보겠습니다. 만약 내 기억을 한 치도 빠짐없이 복사해 서버에 올린 다음, 그 서버 속 '나'가 내 친구들과 대화하고 내 글씨체로 글을 쓴다고 합시다. 그것은 나일까요? 그렇다면 그 순간 '나'는 두 명이 되는 걸까요? 만약 그 둘이 동시에 존재한다면, 어느 쪽이 진짜 '나'일까요? 답이 막힙니다. 이 막힘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평소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던 '나'라는 것이, 사실은 한 번도 깊이 따져 본 적 없는 신비라는 사실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섹션 1에서 예고한 '인문학의 브레이크'를 다시 만납니다. 기술은 "할 수 있는가?"를 묻습니다. 그러나 "해도 되는가?", "그렇게 옮겨진 것이 정말 나인가?", "사람을 사람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 이 물음은 기술이 답해 주지 않습니다. 오직 인문학만이 그 브레이크를 밟을 수 있습니다. 머리 이식 수술을 두고도 한바탕 소동이 있었습니다. 이탈리아 신경외과 의사 세르조 카나베로가 2015년에 사람의 머리를 다른 몸에 옮겨 붙이는 수술을 곧 하겠다고 발표했고, 근육이 굳어 가는 병을 앓던 러시아인 발레리 스피리도노프가 지원자로 나서며 세계 언론을 탔습니다.
결과부터 말하면 그 수술은 지금까지 한 번도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지원자는 2019년에 스스로 계획에서 물러났고, 의학계는 잘린 척수를 다시 잇는 기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이 계획을 과학보다 흥행에 가깝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이미 가능해진 기술'의 사례가 아니라, 기술을 앞질러 달리는 말이 얼마나 쉽게 사실처럼 굳는가를 보여 주는 사례로 읽어야 합니다. 기술이 빨라질수록 "나는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가"라는 인문학의 물음은 더 무거워집니다.
🤔 핵심 질문
내 기억을 그대로 옮긴 서버 속 존재는 나인가?
CHAPTER 08
❓ 7. 과거가 현재를 구할 수 있는가 — 한강의 물음
📌 이 장의 핵심
▸ 한 사회도 자기가 겪은 일을 기억하는 한에서만 그 사회로 이어집니다.
▸ 개인에게 기억이 정체성이듯, 공동체에게 역사는 양심입니다.
자기동일성을 개인을 넘어 공동체로 넓히면, 한 사회의 기억 — 곧 역사 — 이 됩니다. 작가 한강은 5·18 광주를 다룬 2014년 소설 『소년이 온다』에서 이렇게 묻습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두 문장이 한 쌍입니다. 널리 인용되는 사이에 "과거가 현재를 구할 수 있는가"처럼 두 문장이 뒤섞인 형태로도 떠돌지만, 소설의 물음은 이렇게 나란히 놓인 두 개입니다.
이 물음은 자기동일성 논의의 정점에 놓입니다. 개인이 기억의 바통으로 이어지듯, 한 사회도 자기가 겪은 일을 기억하는 한에서만 그 사회로 이어집니다. 아픈 과거를 잊은 사회는, 기억을 잃은 사람이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라는 물음은, 우리가 무엇을 기억하기로 선택하느냐가 곧 우리가 어떤 공동체가 되느냐를 결정한다는 뜻입니다.
뒤따르는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은 여기에 한 겹을 더 얹습니다. 그 기억의 대상이 이미 스스로 말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아프게 일러 주기 때문입니다. 나를 나이게 하는 것이 기억이라면, 우리를 우리이게 하는 것은 함께 기억하기로 한 역사입니다.
여기서 섹션 2의 동물농장 이야기가 다시 떠오릅니다. 권력이 타락하는 무한 루프를 끊으려면, 그 타락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잊은 공동체는 같은 잘못을 또 저지릅니다. 그래서 역사를 기억하는 일은 단순히 옛일을 외우는 게 아니라, 미래의 잘못을 막는 가장 강력한 브레이크입니다.
한강의 물음에 대한 한 가지 답은 이렇습니다. 과거를 똑바로 기억하는 한, 과거는 현재를 도울 수 있습니다. 잊는 순간, 과거는 우리를 다시 같은 비극으로 끌고 갑니다. 개인에게 기억이 정체성이듯, 공동체에게 역사는 양심입니다.
CHAPTER 09
📌 8. 사랑하는 철학자 — 평생 한 사람을 곁에 둔다는 것
📌 이 장의 핵심
▸ 평생의 사랑은 합쳐지지 않는 두 우주가 서로를 향한 호기심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 사랑이 식는 것은 상대를 다 안다고 착각하며 호기심을 멈추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철학자〉라는 영상은 한 철학자가 평생 한 사람을 어떻게 사랑했는가를 들여다봅니다. 철학자라고 하면 차갑게 머리로만 사는 사람 같지만, 가장 깊은 철학은 대개 가장 깊은 사랑에서 나왔습니다. 왜일까요? 사랑이야말로 '다 알 수 없는 타자'와 평생을 함께하겠다는 결단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레비나스의 말을 빌려 "완전한 합일은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평생을 함께하는 사랑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두 우주가 하나로 합쳐지는 것이 아니라, 합쳐지지 않는 두 우주가 서로를 향해 평생 호기심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오래 함께 산 부부가 "이 사람을 이제 다 안다"고 여기는 순간 관계는 굳어 버립니다. 반대로 수십 년을 함께하고도 "이 사람에게는 아직 내가 모르는 면이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늙어서도 서로에게 새롭습니다. 사랑이 식는 것은 상대가 변해서가 아니라, 상대를 다 안다고 착각하면서 호기심을 멈추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섹션 2의 준서가 도달한 자리이기도 합니다. "이제 다 포기했어요, 그냥 이해해요"라는 말은, 상대를 고치려는 노력을 포기한 대신 상대를 끝까지 받아들이기로 한 결단입니다. 다 알 수 없는 사람을 다 알려 들지 않으면서도 곁에 머무는 것 — 철학자들이 평생을 들여 배운 사랑의 기술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니 사랑이 깊다는 것은 상대를 더 많이 안다는 뜻이 아니라, 상대를 다 알 수 없음을 더 깊이 인정한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가장 오래 사랑한 사람일수록 "나는 아직도 이 사람을 다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사랑이 식어서가 아니라 사랑이 깊어서입니다.
CHAPTER 10
💭 9. 우리들의 일상 — '읽씹'과 90퍼센트의 착각
📌 이 장의 핵심
▸ '읽씹' 한 번에 상대 마음을 다 안다고 확신하는 것은 빙산의 끝자락만 보는 일입니다.
▸ 타자 존중의 실제 모습은 단정 대신 질문을 택하는 작은 습관입니다.
타자론을 교실의 일상으로 가져와 보겠습니다. 메시지를 보냈는데 상대가 읽고도 답을 안 하는 이른바 '읽씹'을 당하면, 우리는 순식간에 상대의 마음을 다 안다고 확신합니다. "나를 무시하는구나", "역시 나를 싫어해." 그러나 이것은 물 위로 드러난 얼음 끝자락만 보고 물 아래 전부를 단정하는 일입니다. 상대는 그저 바빴을 수도, 답할 말을 고르고 있었을 수도, 휴대전화를 잠시 두었을 수도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도 똑같습니다. 부모는 "내가 너를 다 안다"며 진로를 정해 주려 하고, 자녀는 "엄마는 나를 하나도 몰라요"라고 항변합니다. 양쪽 다 상대를 10퍼센트만 보고 100퍼센트라 우기는 것입니다. 레비나스의 처방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단정하기 전에 한 번 더 묻는 것. "혹시 무슨 일 있어?" 한마디면, 90퍼센트의 착각이 무너지고 진짜 대화가 시작됩니다. 타자를 존중한다는 거창한 말의 실제 모습은, 단정 대신 질문을 택하는 작은 습관입니다.
CHAPTER 11
📌 영상·텍스트 들여다보기 정리
📌 이 장의 핵심
▸ 타자라는 우주와 나라는 우주는 끝내 다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닮았습니다.
▸ 레비나스·빙산·환대·두 사랑·테세우스의 배·공각기동대·한강의 물음이 한 흐름으로 이어집니다.
이번 섹션에서 우리는 '타자'에서 출발해 '나'로 돌아왔습니다. 레비나스는 타자를 다 알 수 없기에 존중하라 했고, 빙산 비유는 90퍼센트 착각의 위험을 보여 주었으며, 칸트의 환대는 그 존중을 사회와 국제 질서로 넓혔습니다.
기든스와 프롬은 두 갈래의 성숙한 사랑을 가르쳐 주었고, 테세우스의 배와 기억의 릴레이는 무엇이 나를 나이게 하는지를 물었습니다. 공각기동대와 뉴럴링크는 그 물음을 미래로 밀고 갔으며, 한강은 그것을 공동체의 역사로 끌어올렸습니다. 타자라는 우주와 나라는 우주, 둘 다 끝내 다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닮았습니다.
CHAPTER 12
❓ 퀴즈
📌 이 장의 핵심
▸ 객관식 10문항으로 개념을 확인하고, 서술형 3문항으로 타자와 나에 대한 생각을 써 봅니다.
객관식
1. 레비나스가 타자에 대해 한 핵심 주장으로 가장 알맞은 것은?
① 타자는 이해해야만 존중할 수 있다 ② 타자는 이해할 수 없기에 존중해야 한다
③ 타자는 알고 보면 나와 같은 존재다 ④ 타자는 알 필요가 없다 ⑤ 타자는 늘 적이다
2. "각자가 하나의 우주"라는 표현이 뜻하는 바로 알맞은 것은?
① 사람은 모두 똑같다 ② 사람은 우주에서 왔다 ③ 한 사람 안에는 다 헤아릴 수 없는 깊이가 있다
④ 사람은 별처럼 외롭다 ⑤ 우주는 사람보다 작다
3. 부모가 자녀를 "90퍼센트 이상 안다"고 믿는 것의 위험을 설명한 빙산 비유에서, 물 위에 드러난 부분이 가리키는 것은?
① 무의식 ② 의식 ③ 기억 ④ 본능 ⑤ 감정
4. 칸트가 『영구평화론』에서 제안한 것으로, 오늘날의 UN으로 이어졌다고 평가받는 것은?
① 세계 단일 정부 ② 국제연맹 같은 국가 연합 기구 ③ 모든 군대의 해체
④ 강대국의 세계 지배 ⑤ 개인의 무장
5. 기든스의 '합류적 사랑'을 가장 잘 설명한 것은?
① 영원히 하나로 합쳐지는 사랑 ② 두 강물처럼 함께 흐르다 갈라질 수도 다시 만날 수도 있는 열린 관계
③ 한쪽이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사랑 ④ 조건을 따지는 계약적 사랑 ⑤ 사랑은 환상이라는 입장
6. 프롬이 『사랑의 기술』에서 본 사랑의 성격으로 알맞은 것은?
① 받는 것 ② 소유하는 것 ③ 능동적으로 하는 활동 ④ 운명적으로 주어지는 것 ⑤ 거래
7. 테세우스의 배 사고실험이 던지는 핵심 물음은?
① 배는 왜 물에 뜨는가 ② 부품이 다 바뀌어도 같은 존재인가 ③ 누가 배의 주인인가
④ 배는 몇 명을 태우는가 ⑤ 항해는 어디로 향하는가
8. 세포가 다 교체되어도 나를 같은 사람으로 이어 주는 것으로, 본문이 제시한 답은?
① 이름 ② 몸무게 ③ 기억 ④ 지문 ⑤ 혈액형
9. 《공각기동대》와 뉴럴링크가 함께 던지는 인문학적 물음으로 알맞은 것은?
① 기술은 얼마나 빠른가 ② 기억을 옮길 수 있다면 '나'는 어디에 있는가
③ 칩은 얼마나 작은가 ④ 게임은 어떻게 이기는가 ⑤ 마우스는 어떻게 움직이는가
10. 한강이 『소년이 온다』에서 던진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자기동일성 논의와 이어지는 지점은?
① 개인의 외모 ② 공동체가 무엇을 기억하느냐가 그 공동체를 결정한다 ③ 미래 예측 기술
④ 경제 성장 ⑤ 인구 변화
서술형
11. "타자는 이해할 수 없기에 존중해야 한다"는 레비나스의 말을, 친구나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을 떠올려 구체적으로 적용해 보고, 그 사람을 '다 안다'고 여겼을 때와 '다 알 수 없다'고 인정할 때 내 태도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300자 내외로 쓰시오.
12. 낭만적 사랑의 '완전한 합일'은 레비나스의 관점에서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이 주장에 동의하는지 밝히고, 그렇다면 두 사람이 합쳐지지 않고도 깊은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지 자기 생각을 250자 내외로 쓰시오.
13. 뉴럴링크처럼 뇌와 기계를 연결하는 기술이 더 발전한다면, "할 수 있다"와 "해도 된다" 사이에서 인문학이 어떤 '브레이크'를 밟아야 할지 구체적 예를 들어 300자 내외로 쓰시오.
정답 및 해설
1. ② / 레비나스는 상대를 끝내 다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존중의 근거로 삼았습니다.
2. ③ / 한 사람 안에는 본인조차 헤아리지 못하는 깊이가 우주처럼 펼쳐져 있다는 뜻입니다.
3. ② / 빙산에서 물 위로 드러난 작은 끝자락이 의식이고, 물 아래 잠긴 대부분이 무의식입니다. 이 그림은 프로이트의 저작에 실린 도해가 아니라 뒷날 만들어진 교육용 비유이며, 10퍼센트·90퍼센트라는 숫자도 측정값이 아닙니다.
4. ② / 칸트는 여러 나라가 모인 평화의 연맹을 제안했고, 그 구상이 국제연맹과 UN으로 이어졌다고 평가받습니다.
5. ② / 합류적 사랑은 두 강물처럼 함께 흐르다 갈라질 수도 다시 만날 수도 있는 열린 관계입니다.
6. ③ / 프롬은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익혀서 하는 능동적 활동으로 보았습니다.
7. ② / 널빤지를 모두 갈아 낀 배가 여전히 같은 배인가를 물어, 무엇이 동일성을 지탱하는지 따집니다.
8. ③ / 세포가 다 바뀌어도 어제와 오늘을 잇는 바통 노릇을 하는 것은 기억입니다.
9. ② / 칩의 크기나 기술의 속도가 아니라, 그 바통이 몸 밖으로 나갔을 때 '나'의 자리는 어디인가가 두 작품의 물음입니다.
10. ② / 한 사람을 잇는 것이 기억이듯, 한 사회를 잇는 것은 함께 되새기기로 한 역사입니다.
✅ 오늘의 정리
타자는 끝내 다 이해되지 않기에 존중해야 한다.
많이 안다고 여길수록 상대를 조종하려는 착각이 커진다.
성숙한 사랑은 상대를 받아들이고 나를 돌아보는 두 우주의 나란한 흐름이다.
나를 나이게 하는 것은 기억이고, 공동체를 잇는 것은 함께 기억하는 역사다.
타자를 존중하는 작은 습관은 단정하기 전에 한 번 더 묻는 것이다.
📌·🔑·💡·🤔·✅ 표시 상자는 이해를 돕기 위한 편집 요약입니다. 본문은 원문 전문 그대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