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ction5-생각펼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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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페이지의 구성
CHAPTER 01
💭 들어가며 ·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 이 장의 핵심
▸ 두 영화는 마음이 어디에 있으며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를 함께 묻습니다.
▸ 마음은 한 창문으로만 보면 한 면만 보이기에, 다섯 창문을 번갈아 들여다봅니다.
두 편의 영화를 지나오며 우리는 마음의 두 얼굴을 보았습니다. 「인사이드 아웃」에서는 감정들이 본부에서 한 아이의 마음을 움직이는 모습을, 「뷰티풀 마인드」에서는 천재의 뇌가 현실과 환각을 가르지 못하는 모습을 마주했습니다. 두 영화가 함께 던지는 물음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정확히 어디에 있으며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을까요?
섹션 1에서 우리는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의 그 익숙한 감각에서 출발해, 고대 이집트인이 미라를 만들며 심장은 정성껏 보존하고 뇌는 콧구멍으로 빼내어 버렸다는 이야기까지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그들에게 마음의 자리는 심장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뇌가 마음의 자리라는 것을 '안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뇌가 마음을 '만들어 낸다'는 말은 대체 무슨 뜻일까요? 1.4킬로그램의 회백색 덩어리가 어떻게 사랑과 증오를, 기쁨과 슬픔을, 수학적 증명과 시적 영감을 빚어낼 수 있을까요? 이것은 과학만으로는 닿지 못하는, 철학의 영역에 발을 걸친 물음입니다.
한 가지 비유를 들어 보겠습니다.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은 한 채의 큰 방을 여러 창문으로 살피는 일과 같습니다. 어느 한 창문으로만 보면 방의 한 면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동쪽 창으로는 아침 햇살이, 서쪽 창으로는 저녁노을이 들어와 같은 방도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마음도 그러합니다. 철학의 창으로만 보면 개념의 윤곽은 또렷하지만 살아 있는 작동은 흐릿하고, 뇌과학의 창으로만 보면 물질의 기제는 선명하지만 의미는 빠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 창문을 번갈아 들여다보려 합니다.
이번 섹션에서는 '뇌와 마음'이라는 주제를 다섯 개의 창문으로 들여다보겠습니다. 철학, 뇌과학, 심리학, 인공지능, 그리고 실존의 창문입니다. 하나의 정답을 내려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분이 이 깊은 물음과 직접 마주 서서, 자기만의 생각을 빚어 가도록 곁에서 함께 걷고자 합니다. 이 다섯 창문은 끝내 섹션 1에서 던진 다섯 물음 — 나는 뇌인가,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선택은 자유로운가, 기계도 마음을 가지는가, 변하는 뇌 속에 변치 않는 나가 있는가 — 으로 우리를 다시 데려갈 것입니다.
CHAPTER 02
📌 1. 철학의 창 · 심신 문제의 오랜 내력
📌 이 장의 핵심
▸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직감에 맞지만, 비물질인 마음이 몸을 어떻게 움직이는지 설명하지 못합니다.
▸ 물리주의·기능주의·범심론·창발론·동일성 이론이 저마다 다른 답을 내놓습니다.
▸ 모든 입장은 '마음이 뇌로 완전히 설명되는가'라는 한 갈림길 앞에 모입니다.
🔑 심신 이원론
마음은 비물질, 몸은 공간을 차지하는 물질로 서로 별개라는 데카르트의 입장
🔑 감각질
빨강이 빨갛게 느껴지는 것 같은 주관적 느낌
🔑 기능주의
마음 상태를 담은 물질이 아니라 그것이 맡은 기능적 역할로 정의하는 입장
🔑 창발
부분들의 상호작용에서 전체에 전혀 새로운 속성이 나타나는 현상
⚖️ 마음은 뇌로 완전히 설명되는가?
✅ 완전히 설명된다
• 물리주의와 동일성 이론의 입장
• 생명력의 신비가 화학으로 풀렸듯 의식도 언젠가 과학이 메울 빈칸
❌ 무언가가 남는다
• 이원론과 범심론의 입장
• 의식은 '무엇으로 느껴지느냐'의 문제로 차원이 다름
• 바깥의 관찰로는 안에서 느껴지는 것에 닿지 못함
데카르트의 이원론 — 마음과 몸은 별개인가
17세기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방법으로 확실한 지식의 바닥을 찾으려 했습니다. 감각은 속을 수 있고, 꿈과 현실은 헷갈리며, 어쩌면 악마가 우리를 속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뷰티풀 마인드」의 내시처럼,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이 진짜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도무지 의심할 수 없는 한 가지를 붙듭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내가 모든 것을 의심하고 있다면, 적어도 '의심하는 나'만은 있어야 하니까요. 여기서 그는 '생각하는 것'과 '공간을 차지하는 것'을 갈라놓습니다. 마음은 무게도 부피도 없는 비물질이고, 몸은 공간을 차지하는 물질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신 이원론'입니다.
이 생각은 우리의 직감에 잘 들어맞습니다. 생각에는 무게가 없고 감정은 자로 잴 수 없습니다. 내 마음속 빨강의 느낌은 뇌 어디에도 '빨갛게' 박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원론에는 치명적인 구멍이 있습니다. 마음과 몸이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이라면, 둘은 어떻게 서로 영향을 줄까요? 내가 '손을 들자'고 마음먹으면 실제로 손이 올라갑니다. 무게도 없는 생각이 어떻게 물질인 몸을 움직일까요? 데카르트는 뇌 속 작은 기관에서 둘이 만난다고 둘러댔지만, 이는 문제를 푼 것이 아니라 한 칸 뒤로 미룬 것에 가깝습니다.
그럼에도 데카르트의 의심하는 태도 자체는 오늘날에도 빛을 잃지 않습니다. 그는 당연해 보이는 모든 것을 한 번 의심해 본 끝에 도무지 의심할 수 없는 한 점을 찾아냈습니다. '나는 지금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의심하려면 의심하는 누군가가 있어야 하니까요. 당연한 것을 한 번 더 의심해 보는 이 태도가, 사실 철학의 첫걸음이자 이 단원 전체가 권하는 자세이기도 합니다.
물리주의 — 마음은 뇌에 불과한가
이원론의 대안으로 나선 것이 '물리주의'입니다. 세상에 있는 것은 오직 물리적인 것뿐이며 마음도 예외가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마음은 뇌의 활동일 뿐, 의식과 감정과 생각은 모두 신경세포의 발화 패턴으로 환원된다는 것입니다. 20세기 철학자 길버트 라일은 이원론을 '기계 속의 유령'이라 비꼬았습니다.
몸이라는 기계 안에 마음이라는 유령이 들어 있다는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라일은 이것을 '범주 오류'라 불렀습니다. 누가 대학 캠퍼스를 둘러본 뒤 "건물은 봤는데 대학은 어디 있나요?"라고 묻는다면 우스운 일입니다. 대학은 건물과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건물과 사람과 활동의 총체이니까요. 마찬가지로 마음은 뇌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뇌의 활동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현대 신경과학은 물리주의를 강하게 떠받치는 듯 보입니다. 내시의 환각은 도파민 시스템의 이상과 이어져 있었고, 약으로 뇌 화학을 조절하자 환각이 줄었습니다. 특정 부위를 자극하면 특정 감정이나 기억이 떠오르고, 뇌가 다치면 성격과 인지가 바뀝니다. 이 모든 증거가 마음이 뇌에 기댄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물리주의에도 만만찮은 도전이 기다립니다.
의식의 어려운 문제 — 왜 경험이 존재하는가
철학자 데이비드 차머스는 의식 연구를 '쉬운 문제'와 '어려운 문제'로 갈랐습니다. 쉬운 문제란 뇌가 정보를 어떻게 처리하고 행동을 어떻게 다스리는지를 밝히는 일입니다. 시간이 걸릴 뿐, 원리적으로는 과학이 풀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문제는 다릅니다. 왜 이 모든 정보 처리에 '느낌'이 따라붙는가? 왜 빨강을 볼 때 '빨갛게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는가? 통증은 왜 '아픈 느낌'을 동반하는가? 철학자들은 이 주관적 느낌을 '감각질'이라 부릅니다.
호주 철학자 프랭크 잭슨은 '메리의 방'이라는 사고실험을 내놓았습니다. 흑백 방에서만 자란 천재 색채 과학자 메리를 떠올려 보겠습니다. 그녀는 색에 관한 모든 물리적 사실을 압니다. 빨강의 파장이 눈의 어느 세포를 어떻게 자극하고 어느 뇌 부위를 켜는지까지 빠짐없이 압니다. 그런 메리가 어느 날 처음으로 방을 나와 빨간 장미를 봅니다.
그녀는 새로운 것을 알게 될까요? 잭슨은 그렇다고 보았습니다. 메리는 '빨강이 어떻게 보이는지'를 비로소 알게 됩니다. 그것은 모든 물리적 사실을 알아도 알 수 없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식적 경험은 물리적 사실로 다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잭슨 자신은 훗날 이 논증을 거두었지만, 사고실험만은 여전히 의식 철학의 단골 화두로 남아 있습니다.)
기능주의 — 마음은 소프트웨어인가
이원론과 물리주의 사이에 선 입장이 '기능주의'입니다. 마음의 상태는 그것을 담은 물질이 아니라 그것이 맡은 '기능적 역할'로 정의된다는 것입니다. 통증이란 무엇인가? 기능주의자는 답합니다. 조직 손상에서 비롯되어 '아프다'는 믿음을 낳고 회피 행동을 부르는 상태, 그것이 곧 통증입니다.
그 역할을 해내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통증입니다. 이 관점은 흥미로운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마음이 기능으로 정의된다면 꼭 탄소로 된 뇌에서만 깃들 필요가 없습니다. 충분히 복잡한 실리콘 컴퓨터도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같은 프로그램이 다른 기계에서 돌아가듯, 같은 마음 상태가 다른 물질 위에서 구현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본 존 설의 '중국어 방' 논증이 기능주의의 발목을 잡습니다. 규칙대로 알맞은 출력을 내놓는다고 해서 진짜 이해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의식이 있는 듯 행동하지만 속에는 아무 경험도 없는 '좀비'일 수 있다는 물음이, 기능주의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범심론 — 모든 것에 마음의 씨앗이 있는가
최근 철학계에서 다시 주목받는 입장이 '범심론'입니다. 의식이 물질의 근본 속성이며, 모든 물리적 실체가 어떤 형태로든 경험을 가진다는 생각입니다. 전자도, 원자도, 돌멩이도 말입니다. 처음 들으면 황당합니다. 그러나 범심론자들은 인간의 풍부한 의식을 단순한 의식들이 복잡하게 모인 결과로 봅니다. 철학자 갈렌 스트로슨은 범심론이 도리어 물리주의보다 합리적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완전히 무의식적인 물질에서 어떻게 의식이 솟아날 수 있을까요? 없던 것이 갑자기 생겨날 수는 없습니다. 의식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어디선가 와야 하고, 가장 간단한 설명은 의식이 처음부터 물질의 일부였다는 것입니다. 「인사이드 아웃」에서 감정들이 저마다 독립된 관점과 경험을 가진 존재로 그려진 것이, 범심론의 눈으로 보면 단순한 은유 이상일지도 모릅니다.
창발과 환원 — 마음은 어떻게 출현하는가
물리주의를 받아들이면서도 의식의 독특함을 살리려는 시도가 '창발론'입니다. 부분들의 상호작용에서 전체에 전혀 새로운 속성이 나타나는 현상을 창발이라 합니다. 물의 '젖음'을 떠올려 보겠습니다. 물 분자 하나는 젖지 않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분자가 모이면 '젖음'이라는 새 속성이 나타납니다. 마찬가지로 뉴런 하나는 의식이 없지만, 860억 개가 복잡하게 얽히면 의식이 '창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판자들은 묻습니다.
'젖음'은 분자들의 배열로 빈틈없이 설명되지만, 의식은 그렇지 않습니다. 뉴런의 연결을 아무리 정밀하게 그려도 왜 주관적 경험이 따라붙는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차머스가 말한 '설명적 간극'이 여기에 입을 벌리고 있습니다. 토머스 네이글이 "박쥐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라고 물은 까닭도 같습니다. 박쥐의 초음파 감각을 물리학으로 완전히 안다 해도, 박쥐에게 세계가 어떻게 '느껴지는지'는 우리가 닿을 수 없습니다. 주관적 경험의 속살은 객관적 과학의 그물로 건져지지 않습니다.
동일성 이론과 그 한계
또 다른 입장인 '동일성 이론'은 마음 상태가 뇌 상태와 문자 그대로 같다고 봅니다. 통증은 특정 신경 섬유의 발화와 같은 것이라는 식입니다. 물이 곧 H₂O이듯이 말입니다. 단순하다는 매력이 있지만 한계도 뚜렷합니다. '다중 실현 가능성' 문제입니다.
통증이 특정 신경 섬유의 발화와 같다면, 그런 섬유가 없는 존재는 통증을 못 느껴야 합니다. 그러나 신경 구조가 사뭇 다른 문어도 통증을 느끼는 듯 보입니다. 같은 마음 상태가 서로 다른 물리 상태로 실현될 수 있다는 뜻이며, 이는 마음과 특정 뇌 상태를 곧장 등호로 묶기 어렵게 만듭니다.
갈림길에 선 우리 — 환원이냐 아니냐
여섯 입장이 복잡해 보이지만, 한 발 물러서면 이들은 모두 하나의 갈림길 앞에 모여 있습니다. 마음은 뇌로 '완전히 설명되는가', 아니면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가 남는가'. 이 한 물음이 모든 입장을 가릅니다. 물리주의와 동일성 이론은 앞쪽에 서고, 이원론과 범심론은 뒤쪽에 서며, 기능주의와 창발론은 그 사이 어딘가에서 줄타기를 합니다.
이 갈림길은 추상적인 말장난이 아닙니다. 한 가지 비유로 풀어 보겠습니다. 음악을 떠올려 보세요. 어떤 사람은 음악이란 그저 공기의 진동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주파수와 진폭으로 모든 것을 적을 수 있으니까요. 틀린 말은 아닙니다. 실제로 음악은 공기의 진동 없이 존재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악보의 모든 음표를 물리량으로 완벽하게 기술했다고 해서, 그 곡을 들을 때 가슴이 뭉클해지는 그 무엇까지 적어 낸 것일까요?
진동을 아무리 정밀하게 측정해도 '아름다움'이라는 항목은 그 표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마음을 둘러싼 논쟁이 꼭 이와 같습니다. 마음이 뇌의 활동 없이 존재하지 못한다는 데에는 대부분 동의합니다. 다툼은 그다음입니다. 뇌의 활동을 다 적어 내면 마음도 다 적은 것인가, 아니면 진동표에 없는 '아름다움'처럼 무언가가 끝내 빠져나가는가.
물리주의자는 빠져나가는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지금은 설명하지 못해도 언젠가 과학이 다 메울 빈칸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한때 생명이 신비로운 '생명력' 덕분이라 여겨졌지만 끝내 화학으로 설명되었듯, 의식도 그렇게 풀릴 것이라고요. 반대편에서는 의식의 빈칸이 다른 빈칸과는 종류가 다르다고 봅니다. 생명은 '무엇을 하느냐'의 문제였지만, 의식은 '무엇으로 느껴지느냐'의 문제이고, 이 둘은 차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바깥에서 관찰해도 안에서 느껴지는 그 무엇에는 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에 마음이 기우나요? 정답을 고르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자신이 어느 쪽으로 기우는지를 아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자기 자신을 한 뼘 더 알게 됩니다. '나는 그저 정교한 기계'라고 보는 사람과 '나에게는 기계로 환원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고 보는 사람은, 같은 하루를 살아도 자기 자신을 대하는 결이 다릅니다.
이 갈림길에서 어디에 서느냐가, 곧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두 영화도 이 갈림길 위에 서 있습니다. 「인사이드 아웃」은 마음을 뇌 안의 과정으로 그리면서도 그것을 한낱 기계로 깎아내리지 않았고, 「뷰티풀 마인드」는 뇌의 고장이 마음을 무너뜨리는 모습을 보여 주면서도 끝내 사랑이라는, 물리량으로 적히지 않는 무엇에 기대어 한 사람을 일으켰습니다.
🤔 핵심 질문
나는 '정교한 기계'인가, 기계로 환원되지 않는 무언가를 지닌 존재인가?
CHAPTER 03
📌 2. 뇌과학의 창 · 마음의 물질적 바탕
📌 이 장의 핵심
▸ 860억 개의 뉴런과 약 100조 개의 연결이 마음의 물질적 바탕을 이룹니다.
▸ 맹시는 정보 처리와 의식적 경험이 서로 다른 일임을 보여 줍니다.
▸ 경험과 훈련이 뇌를 바꾸고, 뇌는 바깥을 받아 적기보다 예측해 현실을 빚습니다.
🔑 맹시
시각 정보를 처리하면서도 본다는 의식적 경험은 없는 현상
뇌는 어떻게 마음을 만드는가
철학의 논쟁 곁에서, 뇌과학은 마음에 대한 구체적인 그림을 건넵니다. 인간의 뇌에는 약 860억 개의 뉴런이 있고, 저마다 수천 개의 시냅스로 다른 뉴런과 이어집니다. 총 연결은 약 100조 개에 이릅니다. 뉴런은 전기 신호와 화학 신호로 소통합니다. 뉴런이 발화하면 전기 신호가 축삭을 타고 흐르고, 그 끝에서 신경전달물질이 시냅스 틈으로 뿌려져 다음 뉴런을 깨웁니다.
도파민, 세로토닌 같은 여러 물질이 저마다 다른 역할을 맡습니다. 「인사이드 아웃」에서 기억 구슬이 빛깔을 띤 것은 감정과 기억의 끈끈한 관계를 비춥니다. 실제로 편도체라는 부위는 감정적으로 중요한 경험에 표시를 달아 오래 남게 합니다. 우리가 감정이 강렬했던 순간을 더 또렷이 기억하는 까닭입니다.
의식의 신경 상관물
의식이 무엇이냐는 철학의 물음이지만, 의식이 뇌에서 어떻게 생기느냐는 과학의 물음입니다. 신경과학자들은 특정 의식 경험과 짝지어지는 뇌 활동, 곧 '의식의 신경 상관물'을 찾습니다. 그런데 정보 처리가 곧 의식은 아닙니다. '맹시'라는 현상이 있습니다. 일차 시각 피질이 손상된 환자는 자신이 아무것도 못 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시각 자극의 위치를 '추측'하라 하면 우연을 훌쩍 넘는 정확도로 맞힙니다. 그들의 뇌는 시각 정보를 처리하지만 의식적 경험은 없는 것입니다. 의식이 단순한 정보 처리 이상의 무언가임을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정보가 뇌 안을 흐르는 것과 그 정보가 '느껴지는' 것은 다른 일이라는 뜻입니다. 컴퓨터도 정보를 처리하지만 무언가를 느끼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뇌에서는 무엇이 더해질 때 정보 처리가 비로소 '경험'으로 켜지는 것일까요? 이것이 신경과학이 아직 정복하지 못한 가장 어려운 봉우리입니다.
한 유력한 설명인 '전역 작업공간 이론'은, 정보가 뇌의 '전역 작업공간'에 널리 방송될 때 의식이 생긴다고 봅니다. 국지적으로만 처리되면 무의식이고, 전역으로 공유되면 의식이 됩니다. 「인사이드 아웃」의 본부는 이 전역 작업공간의 은유로 읽을 수 있습니다.
자유의지의 신경과학
내시가 환각에 반응하지 않기로 '선택'한 것은 자유의지의 한 장면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섹션 2에서 만난 리벳의 실험은 도전적입니다. 의식적 결심보다 약 0.3초 먼저 뇌에서 '준비 전위'가 나타났습니다. 뇌가 먼저 결정한 뒤에야 우리가 '결정했다'고 느낀다는 것입니다. 이는 의식적 의지가 행동의 원인이 아니라 부산물일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그러나 준비 전위가 '결정'인지 그저 '준비'인지 분명치 않다는 반론이 있고, 내시처럼 오래 숙고한 결정은 손목 까딱하는 단순 행동과 다를 수 있습니다. 리벳 자신도 자유의지를 통째로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거부권'의 가능성을 남겼습니다. 뇌가 행동을 시작해도 의식이 그것을 멈춰 세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시가 환각에 반응하려는 충동을 '거부'한 것과 닮았습니다.
뇌의 가소성 — 마음이 뇌를 다시 빚는다
신경가소성은 뇌가 평생에 걸쳐 변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런던 택시 운전사 연구가 유명합니다. 복잡한 도로망을 통째로 외운 운전사들은 공간 기억을 맡는 해마가 일반인보다 컸고, 경력이 길수록 더 컸습니다. 경험이 뇌를 물리적으로 바꾼 것입니다. 명상 연구도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장기 수행자는 주의와 자기 인식을 맡는 부위가 더 두껍고, 단 8주의 마음챙김 훈련만으로도 스트레스 반응을 맡는 편도체가 줄고 학습·기억을 맡는 해마의 밀도가 늘었습니다. 마음의 활동이 뇌의 구조를 바꾸고, 바뀐 뇌가 다시 마음에 영향을 줍니다.
내시가 환각을 무시하는 연습을 거듭했을 때 그의 뇌도 문자 그대로 다시 짜였을 것입니다. 「인사이드 아웃」에서 성격의 섬이 무너졌다 다시 서는 것은 이 가소성의 은유입니다. 우울의 치료, 중독의 회복, 상처의 극복이 모두 이 능력에 기댑니다. 이 사실은 청소년에게 특히 든든한 소식입니다.
'나는 원래 수학을 못해', '나는 원래 소심해'라는 말은 절반만 맞습니다. 지금의 뇌는 지금까지의 경험이 새긴 모양일 뿐, 앞으로의 경험이 다시 새길 여지가 늘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반복하느냐가 곧 어떤 사람이 되느냐를 정합니다. 오늘 한 번의 연습이 당장은 표 나지 않아도, 그것이 쌓이면 뇌의 길이 됩니다.
뇌는 예측 기계다 — 현실은 통제된 환각인가
최근 뇌과학에서 가장 도발적인 이론은 '예측 코딩'입니다. 뇌는 바깥을 수동적으로 받아 적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다음에 무엇이 올까"를 예측하고, 예측과 실제 입력의 '오차'만을 처리한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결론이 따라옵니다. 우리가 겪는 '현실'은 바깥 세계의 직접 복사가 아니라 뇌가 감각 데이터를 바탕으로 빚어낸 '최선의 추측'입니다. 이 눈으로 보면 내시의 환각은 예측 체계의 오작동입니다.
그의 뇌가 빚은 예측이 감각 증거에 의해 고쳐지지 못한 것입니다. 정상적인 뇌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꿈을 꿀 때 우리는 뇌의 시뮬레이션을 현실로 겪고, 착시도 예측이 실제 입력과 어긋날 때 일어납니다. 그래서 신경과학자 아닐 세스는 깨어 있는 의식조차 일종의 '통제된 환각'이라고 말합니다. 내시의 환각과 우리의 평범한 지각 사이의 차이는 본질의 차이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일지도 모릅니다.
거울뉴런과 공감, 그리고 두 뇌의 협력
섹션 2에서 본 거울뉴런은 공감의 신경적 바탕으로 제안됩니다. 남의 행동을 볼 때 내 뇌에서도 비슷한 활동이 일어나기에, 우리는 남의 고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인사이드 아웃」에서 엄마가 라일리의 슬픔에 젖는 순간, 「뷰티풀 마인드」에서 앨리샤가 내시의 혼란을 어떤 수준에서 함께 느끼는 순간이 그러합니다. 다만 인간의 거울뉴런은 원숭이만큼 명확하지 않고, 공감에는 상대의 관점을 이해하는 인지적 요소와 감정을 나누는 정서적 요소가 함께 들어가기에, 거울뉴런 하나로 공감의 전부를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한편 뇌는 진화적으로 층층이 쌓여 왔습니다. 오래된 안쪽은 생존 본능을, 가운데는 감정을, 바깥의 신피질은 이성적 사고를 맡는다는 그림이 있습니다. 지나친 단순화라는 비판을 받지만, 오래된 뇌와 새로운 뇌가 때로 부딪친다는 통찰만은 살아 있습니다. 「인사이드 아웃」의 감정들과 이성적 판단의 관계가 그러합니다. 다만 다마지오가 보여 주었듯, 감정 없이는 이성도 제대로 작동하지 못합니다. 둘은 맞서는 사이가 아니라 손잡는 사이입니다.
뇌를 고치고 넓히는 기술 — 약, 자극, 그리고 인터페이스
뇌가 마음의 물질적 바탕이라는 사실은 한 가지 묵직한 가능성을 열어 놓습니다. 물질을 손볼 수 있다면 마음도 손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울증 약은 뇌의 화학적 균형에 작용해 기분을 바꾸고, 뇌의 특정 부위를 자극하는 치료는 약이 듣지 않는 우울에 쓰입니다. 「뷰티풀 마인드」에서 내시가 먹은 약이 환각을 줄이면서 동시에 사고력까지 무디게 한 장면은, 마음을 물질로 다루는 일에 늘 양면이 따른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무언가를 얻으면 무언가를 내어 줍니다.
최근에는 뇌와 컴퓨터를 직접 잇는 기술이 빠르게 자라고 있습니다. 전신이 마비된 환자가 생각만으로 컴퓨터 커서를 움직이고 글자를 입력하는 일이 실제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기술은 처음에는 마비나 질환을 돕는 의료의 자리에서 출발하지만, 끝내는 멀쩡한 사람의 인지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까지 나아갈지 모릅니다.
그때 우리는 새로운 물음 앞에 서게 됩니다. 칩으로 기억력을 끌어올린다면 그 기억은 '내' 기억일까요? 기억을 바깥 장치에 맡길 수 있다면 '나'의 경계는 어디까지일까요? 마음이 뇌에 기댄다면, 뇌를 기술로 넓힐 때 마음도 함께 넓어지는 것일까요,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되는 것일까요?
이 기술은 책임의 문제와도 얽힙니다. 우리의 선택이 뇌의 상태에 좌우된다면, 그리고 그 뇌를 약과 자극과 장치로 바꿀 수 있다면, '내가 한 선택'과 '내 뇌가 한 선택'의 경계는 점점 흐려집니다. 법정에 뇌 스캔이 증거로 오르는 일이 늘어나는 것도 이 흐림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 뇌가 결정에 영향을 준다는 것과 뇌가 나 대신 결정한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기술이 뇌를 더 깊이 들여다보고 더 많이 손볼 수 있게 될수록, '나는 내 행동의 주인인가'라는 오래된 물음은 도리어 더 절실해집니다.
CHAPTER 04
📌 3. 심리학의 창 · 마음의 작동 원리
📌 이 장의 핵심
▸ 우리 행동과 감정의 상당 부분은 의식의 수면 아래에서 움직입니다.
▸ 감정은 미리 새겨진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구성되며, 감정 없이는 합리적 결정도 어렵습니다.
▸ 이름 붙이기·다시 해석하기·바라보되 매달리지 않기·관계로 나가기로 마음을 다룰 수 있습니다.
🔑 감정의 구성 이론
뇌가 몸의 감각·경험·맥락·문화를 버무려 감정을 순간순간 빚는다는 배럿의 이론
🔑 성장 마인드셋
노력과 배움으로 능력이 자란다고 믿는 태도
의식과 무의식 — 빙산의 비유를 넘어서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마음을 빙산에 견주었습니다. 수면 위 작은 부분이 의식이고, 수면 아래 거대한 덩어리가 무의식이며, 우리 행동과 감정의 대부분은 무의식의 손에 끌려간다는 것입니다. 현대 심리학은 프로이트의 세부 이론을 많이 넘어섰지만, 무의식적 처리의 막대함만은 거듭 확인했습니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다루는 정보량은 초당 수십 비트에 불과한 반면, 무의식이 처리하는 양은 그 수십만 배에 이른다는 추정이 있습니다. 「인사이드 아웃」에는 '잠재의식'이라는 지역이 등장합니다. 어릴 적 무서워한 광대, 억눌린 불안이 갇혀 있는 그곳은 의식의 본부에 슬며시 영향을 미칩니다. 무의식적으로 스친 자극이 이후의 판단과 행동에 스며드는 '점화 효과'도 오래 연구되어 왔습니다. 다만 여기에는 조심할 대목이 있습니다. 노인을 떠올리게 하는 단어를 본 사람이 방을 나설 때 더 느리게 걷더라는 유명한 실험은, 뒷날 다른 연구진이 같은 절차로 되풀이했을 때 같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무의식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큰 그림은 그대로 서 있지만, 그 영향의 크기를 보여 준다던 낱낱의 실험 가운데는 다시 검증대에 오른 것이 적지 않습니다. 심리학이 자기 결과를 스스로 다시 재고 있다는 뜻이며, 이것은 학문의 흠이 아니라 건강함의 표시입니다. 「뷰티풀 마인드」의 환각도 일종의 무의식의 산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찰스는 내시가 갖지 못한 사교성을, 파처는 중요한 사람이고 싶은 욕구를 대신합니다.
환각은 내시의 무의식적 갈망과 두려움이 의식의 표면으로 솟구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무의식은 끊임없이 작동합니다. 이유 없이 어떤 사람이 끌리거나 어떤 노래가 좋아지는 것, 분명히 결심했는데 자꾸 미루게 되는 것, 꿈에 엉뚱한 장면이 펼쳐지는 것. 이 모두가 의식의 수면 아래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우리가 '내가 다 안다'고 믿는 그 마음의 대부분은, 사실 우리가 들여다보지 못하는 어둠 속에 잠겨 있는 셈입니다.
자아와 정체성 — 누가 '나'인가
"나는 누구인가"는 철학과 심리학의 뿌리 깊은 물음입니다. 「인사이드 아웃」의 성격의 섬은 라일리의 정체성을 이루는 조각들입니다. 그것이 무너질 때 라일리는 정체성 위기를 겪습니다. 에릭 에릭슨은 청소년기를 '정체성 대 역할 혼란'의 시기로 보았습니다. 이 시기에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원하는가, 어떤 가치를 믿는가"와 씨름합니다. 열한 살 라일리가 바로 그 길목에 서 있습니다. 현대 뇌과학은 자아에 대해 한 단서를 보탭니다. 섹션 2에서 만난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는 자기를 돌아보고 과거를 떠올리고 미래를 그릴 때 켜지며, '자아'의 신경적 바탕으로 여겨집니다. 명상 중에는 이 회로의 활동이 잦아드는데, 수행자들이 보고하는 '자아의 해체' 경험이 이와 닿아 있을 수 있습니다.
불교의 '무아', 곧 고정된 자아란 없다는 통찰이 과학적 근거를 가질 가능성도 여기 있습니다. 「인사이드 아웃」은 묻습니다. 라일리 안에 여러 감정이 산다면 진짜 라일리는 누구일까요? 영화는 라일리가 감정들과 동떨어진 별도의 존재가 아니라 감정들의 상호작용 그 자체임을 넌지시 일러 줍니다. 이 물음은 청소년에게 특히 가깝습니다.
"진짜 나는 누구일까", "나는 왜 어제와 오늘이 다를까", "친구들 앞의 나와 혼자일 때의 나 가운데 어느 쪽이 진짜일까." 이런 흔들림은 모자람의 증거가 아니라, 정체성이 한창 빚어지는 중이라는 증거입니다. 고정된 '진짜 나'를 한 번에 찾아내야 한다는 압박을 내려놓아도 좋습니다. 나는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고, 그 만들어 가는 과정 자체가 나이기 때문입니다.
감정은 만들어지는가 — 감정의 구성 이론
오랫동안 감정은 생물학적으로 미리 새겨진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폴 에크만의 연구는 기본 감정이 모든 문화에서 같은 표정으로 나타난다고 보았고, 「인사이드 아웃」은 그 위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심리학자 리사 펠드먼 배럿은 '감정의 구성 이론'을 내놓았습니다. 감정은 뇌에 미리 프로그램된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구성된다'는 것입니다. 뇌는 몸의 감각, 과거 경험, 지금의 맥락, 문화적 개념을 한데 버무려 감정을 빚어냅니다. 심장이 빨리 뛰고 손에 땀이 날 때, 우리는 그것을 시험 앞에서는 불안으로, 롤러코스터 위에서는 흥분으로, 매력적인 사람 앞에서는 설렘으로 해석합니다.
같은 몸 상태가 맥락에 따라 다른 감정이 됩니다. 이 눈으로 보면 다섯 감정 캐릭터는 단순화입니다. 실제 감정은 훨씬 미묘하고 섞여 있으며 맥락에 매여 있습니다. 영화 끝의 복합 감정은 바로 그 복잡함을 인정한 장면입니다. 배럿의 이론은 희망의 문도 엽니다. 감정이 구성되는 것이라면 그 구성 과정에 우리가 끼어들 수 있습니다. 몸의 감각에 다른 의미를 붙이고, 감정 어휘를 넓히고, 맥락을 다시 해석함으로써 감정 경험 자체를 바꿀 수 있습니다.
인지와 감정의 협력
오랫동안 이성과 감정은 맞서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플라톤은 이성을 마부에, 감정을 말에 견주며 이성이 감정을 다스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마지오가 연구한 전두엽 손상 환자들은 이 이분법을 흔듭니다. 그들은 지능과 논리가 멀쩡한데도 일상의 결정마다 무너졌습니다. 점심 메뉴 하나도 끝없이 따지기만 했습니다. 다마지오는 우리가 결정할 때 몸에서 오는 감정적 신호가 선택지에 값을 매긴다는 '신체 표지 가설'을 내놓았습니다. 과거에 나쁜 결과와 이어졌던 선택지는 불쾌한 몸의 반응을 부르고, 그것이 그 선택지를 피하게 합니다. 감정 없이는 합리적 결정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뷰티풀 마인드」의 내시는 극단적 이성주의자였지만, 그를 망상의 늪에서 건진 것은 논리가 아니라 앨리샤의 사랑, 곧 감정적 연결이었습니다. "마음으로 보아야 진실이 보인다"는 말이 다마지오의 통찰과 한자리에서 만납니다. 진로를 고를 때를 떠올려 보세요.
장단점을 표로 아무리 정리해도 마음이 가지 않는 길은 끝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반대로 '이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는 그 감정의 신호가, 수많은 분석으로도 내리지 못한 결정을 한순간에 내려 주기도 합니다. 감정은 이성을 흐리는 안개가 아니라, 이성이 길을 잃지 않게 잡아 주는 손입니다.
트라우마와 뇌 — 상처는 비유가 아니다
트라우마는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깁니다. 그런데 이 상처는 비유가 아닙니다. 트라우마는 뇌에 실제로 측정되는 변화를 일으킵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환자의 뇌에서는 위협을 감지하는 편도체가 과하게 켜지고, 기억을 맥락에 앉히는 해마가 위축되며, 충동을 다스리는 전두엽의 기능이 떨어져 있음이 보고됩니다. 플래시백과 과각성, 감정 조절의 어려움이 여기서 비롯됩니다. 정신과 의사 베셀 반 데어 콜크는 트라우마 기억이 언어적 이야기가 아니라 몸의 감각과 감정과 이미지로 저장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트라우마 치료에는 몸을 쓰는 접근이 효과적입니다.
「인사이드 아웃」에서 라일리가 겪는 것은 트라우마 수준은 아니지만, 상실과 스트레스가 정체성을 흔드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회복은 안전한 관계, 곧 부모의 품 안에서 감정을 표현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마음의 상처가 몸에 새겨진다는 사실은, 마음의 고통을 결코 '마음먹기 나름'으로 가볍게 넘겨선 안 된다는 것을 일러 줍니다. 깊은 상처는 의지로 지워지지 않으며, 때로는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다리가 부러지면 깁스를 하듯, 마음이 크게 다쳤을 때 도움을 구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자신을 돌보는 가장 현명한 일입니다.
성장 마인드셋 — 뇌는 변할 수 있다
심리학자 캐럴 드웩은 '마인드셋' 이론을 내놓았습니다. '고정 마인드셋'을 가진 사람은 능력이 타고나 굳어 있다고 믿고, '성장 마인드셋'을 가진 사람은 노력과 배움으로 능력이 자란다고 믿습니다. 연구에 따르면 성장 마인드셋을 가진 학생은 도전을 더 잘 받아들이고 실패에서 더 잘 일어나며 끝내 더 높은 성취에 이릅니다. 한 가지 더, 뇌가 변할 수 있다는 신경가소성을 배우는 것만으로도 마인드셋이 바뀔 수 있습니다. 뇌가 변한다는 사실을 알면 자기 능력도 변할 수 있다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뷰티풀 마인드」의 내시는 극단적인 성장 마인드셋의 사례입니다.
조현병이라는 진단 앞에서도 그는 자신이 변하고 적응할 수 있다고 믿었고, 환각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웠습니다'. 뇌의 가소성과 인간 의지가 손잡은 결과입니다. 시험을 망친 뒤 "역시 나는 안 돼"라고 닫아 버리는 사람과 "이번엔 이게 부족했구나"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같은 실패에서 전혀 다른 다음을 만듭니다. 능력은 고정된 점수가 아니라 자라는 근육이라는 믿음이, 실제로 그 근육을 자라게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에는 과학적 근거가 있습니다. 뇌가 변한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가 변할 수 있다는 가장 든든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흐름 — 가장 좋은 마음의 상태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흐름'을 연구했습니다. 어떤 활동에 완전히 몰입해 시간 감각을 잃고 자의식이 사라지며 활동 그 자체가 보상이 되는 상태입니다. 흐름은 도전의 수준과 기술의 수준이 모두 높고 균형을 이룰 때 찾아옵니다. 도전이 기술보다 높으면 불안이, 기술이 도전보다 높으면 지루함이 자리합니다. 흐름 속에서 사람은 최고의 수행과 최고의 행복을 함께 누립니다. 좋아하는 일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입니다. 그림을 그리거나 악기를 연주하거나 운동에 몰두할 때, 자의식이 사라지고 활동 그 자체가 즐거움이 되는 그 순간이 바로 흐름입니다.
공부도 너무 쉬우면 지루하고 너무 어려우면 불안하지만, 딱 한 뼘 어려운 과제에 도전할 때 가장 깊이 빠져들고 가장 많이 배웁니다. 한 가지 짚어 둘 점은, 흐름 상태에서는 자아에 대한 의식이 잦아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나'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지만, 흐름 속에서는 그 사로잡힘에서 풀려납니다.
명상에서 보고되는 경험과 닮았습니다. 「뷰티풀 마인드」의 내시가 수학에 빠져들 때 그는 흐름 안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광기 역시 일종의 몰입이었습니다. 환각 속 임무에 너무 깊이 빠져 현실을 놓아 버린 것입니다. 흐름은 양날의 칼일 수 있습니다.
마음을 다루는 법 — 심리학이 건네는 연습
지금까지의 심리학 이야기는 한 가지 희망으로 모입니다. 마음은 고정된 운명이 아니라 다룰 수 있는 무엇이라는 것입니다. 무의식이 우리를 끌고 간다 해도 우리는 그 끌림을 알아챌 수 있고, 감정이 구성되는 것이라면 그 구성에 끼어들 수 있으며, 뇌가 변할 수 있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추상적인 위로가 아니라 실제 연습으로 옮길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첫째 연습은 '이름 붙이기'입니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 그 감정에 정확한 이름을 붙여 보는 것만으로도 편도체의 흥분이 가라앉습니다. "그냥 기분이 나빠"가 아니라 "나는 지금 실망했고, 거기에 약간의 부끄러움이 섞여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감정에 휩쓸리는 대신 감정을 바라보는 자리에 섭니다. 감정 어휘가 풍부할수록 마음을 다루는 손놀림도 섬세해집니다.
둘째 연습은 '다시 해석하기'입니다. 감정의 구성 이론이 일러 주듯, 같은 몸의 신호도 어떤 의미를 붙이느냐에 따라 다른 감정이 됩니다. 발표를 앞두고 심장이 뛸 때 "나는 불안하다"가 아니라 "나는 준비되어 있고 몸이 깨어나는 중이다"라고 바꿔 읽으면, 똑같은 두근거림이 나를 무너뜨리는 대신 나를 끌어올립니다. 거짓 자기최면이 아닙니다. 어느 해석도 처음부터 정해져 있지 않기에, 더 도움이 되는 쪽을 고르는 것뿐입니다.
셋째 연습은 '바라보되 매달리지 않기'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떠오를 때 그것과 싸워 없애려 하면 도리어 더 단단히 들러붙습니다. 흰곰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자꾸 흰곰만 떠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생각을 적으로 삼는 대신 "아, 또 그 생각이 왔구나" 하고 가만히 지켜보다 흘려보내는 것, 그것이 마음챙김이 가르치는 태도입니다. 내시가 환각을 없애려 싸우는 대신 그저 반응하지 않기로 한 것과 같은 결입니다.
넷째 연습은 '관계로 나가기'입니다. 마음은 홀로 회복되지 않습니다. 힘든 감정을 신뢰할 수 있는 누군가와 나눌 때 그 무게가 덜어집니다. 라일리가 부모 앞에서 울 때 비로소 치유가 시작된 것처럼, 취약함을 드러내는 일은 약함이 아니라 회복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이 네 가지 연습은 거창한 수행이 아니라, 오늘 당장 작게 시작할 수 있는 마음의 운동입니다.
☑️ 마음을 다루는 네 가지 연습
☑️ 이름 붙이기 — 감정에 정확한 이름을 붙여 본다
☑️ 다시 해석하기 — 같은 몸의 신호에 더 도움이 되는 의미를 고른다
☑️ 바라보되 매달리지 않기 — 생각을 적으로 삼지 않고 흘려보낸다
☑️ 관계로 나가기 — 힘든 감정을 믿을 수 있는 사람과 나눈다
🤔 핵심 질문
같은 두근거림을 나는 불안으로 읽는가, 준비의 신호로 읽는가?
CHAPTER 05
📌 4. 인공지능의 창 · 기계도 마음을 가질 수 있는가
📌 이 장의 핵심
▸ 튜링 테스트를 통과해도 중국어 방 논증은 진짜 이해가 있는지를 되묻습니다.
▸ 우리는 다른 존재에게 의식이 있는지를 바깥에서 확인할 수 없습니다.
▸ 기계의 마음을 묻는 일은 끝내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묻게 합니다.
튜링 테스트와 그 한계
1950년 앨런 튜링은 "기계가 생각할 수 있는가"라는 모호한 물음을 다루기 쉽게 바꿨습니다. 기계가 대화로 사람을 속여 자신을 사람이라 믿게 만들 수 있다면 '생각한다'고 보아도 좋다는 것입니다. 2020년대에 이르러 거대 언어 모델들은 이 시험을 상당 부분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생각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존 설의 중국어 방이 다시 손을 듭니다.
언어 모델은 통계적 패턴에 따라 단어를 내놓을 뿐 의미를 '이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론도 있습니다. '시스템 답변'에 따르면, 방 안의 사람 하나는 중국어를 모르더라도 방이라는 체계 전체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개별 뉴런은 생각하지 못해도 뇌 전체는 생각하듯이 말입니다. 인공지능 체계도 그러할지 모릅니다.
인공 의식의 가능성
의식 있는 인공지능을 만들 수 있을까요? 기능주의가 옳다면 원리적으로는 가능합니다. 마음이 기능으로 정의된다면 그 기능을 실리콘 위에서 구현하지 못할 까닭이 없으니까요. 그러나 '어려운 문제'가 그대로 남습니다. 정보를 처리하고 행동을 만들어 내는 것과 주관적 경험을 갖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아무리 정교한 인공지능도 겉으로만 의식이 있는 듯 행동하는 '좀비'일 수 있습니다. 한편 범심론은 다른 그림을 그립니다.
의식이 물질의 근본 속성이라면 실리콘 칩에도 미세한 의식의 씨앗이 있을 테고, 충분히 복잡한 체계라면 그 씨앗들이 모여 풍부한 의식을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사이드 아웃」의 감정 캐릭터들은 라일리의 뇌라는 하드웨어 위에서 돌아가는 일종의 소프트웨어 행위자처럼 보입니다. 그들이 진짜 의식을 가졌는지 영화는 답하지 않지만, 적어도 저마다의 관점과 감정과 목표를 가진 듯 움직입니다.
인공지능 시대에 마음을 다시 묻다
인공지능의 발전은 우리에게 마음을 새로 묻게 합니다. 인간의 마음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인공지능이 사람과 똑같이 행동할 수 있다면 인간 마음의 고유함은 어디에 있을까요? 어쩌면 이 물음 자체가 인간 중심의 편견일 수 있습니다. 의식과 마음이 정도의 차이일 뿐이라면, 인간과 기계 사이에 본질적인 선을 긋는 일은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뷰티풀 마인드」에서 내시의 뇌가 빚은 찰스와 파처와 마르시는 일종의 '인공 인격'입니다. 그들은 내시의 신경 활동이 만들어 낸 시뮬레이션입니다. 그런데 '진짜'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덜 실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내시에게 그들은 수십 년을 함께한 '진짜' 친구였습니다. 우리가 인공지능과 어떤 관계를 맺을지, 그것에 어떤 도덕적 지위를 줄지는 끝내 '마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우리의 대답에 달려 있습니다.
창의성과 공감, 그리고 마음의 융합
요즘 인공지능은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고 곡을 만듭니다. 이것은 진짜 창의성일까요, 정교한 모방일까요? 창의성을 '새롭고 쓸모 있는 것을 만드는 능력'으로 정의하면 인공지능은 분명 창의적입니다. 그러나 '의도와 의미를 담아 표현하는 것'으로 정의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피트 닥터 감독은 자기 딸의 변화를 지켜본 경험에서 「인사이드 아웃」의 씨앗을 얻었습니다. 그의 개인적 경험과 감정이 영화에 녹아 있습니다. 인공지능이 비슷한 영화를 만들 수는 있어도, 그것이 같은 종류의 '창작'일지는 따져 물을 일입니다.
공감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부 심리 상담 챗봇은 판단받는 느낌이 없어 도리어 더 솔직한 대화를 끌어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 상담사와의 관계에서 치유가 일어나는 까닭은 단지 기법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인간이 나를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경험 때문입니다. 「뷰티풀 마인드」에서 앨리샤의 사랑이 내시에게 특별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이 '인간'의 사랑이어서였을까요? 완벽하게 공감하는 기계가 있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을까요?
이 모든 물음의 밑바닥에는 한 가지 곤란한 사실이 깔려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존재에게 의식이 있는지를 결코 바깥에서 확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내 마음을 직접 겪지만, 옆자리 친구의 마음은 오직 그 행동과 말로 짐작할 뿐입니다. 친구가 진짜로 빨강을 나와 똑같이 느끼는지조차 나는 증명하지 못합니다. 이 오래된 '타자의 마음' 문제가 인공지능 앞에서 가장 날카로워집니다. 인공지능이 "나는 슬프다"고 말할 때, 우리에게는 그 말이 진짜 느낌인지 정교한 흉내인지 가려낼 잣대가 없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영영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물음이 단지 기계에 관한 물음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관한 물음이라는 점입니다. 인공지능에게 마음이 있느냐를 따지다 보면, 끝내 '그렇다면 나의 마음은 무엇이 다른가'를 묻게 됩니다. 인공지능을 비추는 거울 속에서 우리는 인간 마음의 윤곽을 다시 보게 됩니다. 어쩌면 인공지능 시대의 가장 큰 선물은, 기계를 닮은 답이 아니라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오래된 물음을 새로 던지게 해 준다는 데 있는지도 모릅니다.
CHAPTER 06
📌 5. 실존의 창 · 마음을 어떻게 살 것인가
📌 이 장의 핵심
▸ 사르트르는 인간이 자유롭도록 선고받았으며, 먼저 존재한 뒤 스스로를 만들어 간다고 보았습니다.
▸ 고통 속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고, 마음은 관계 속에서 빚어지고 치유됩니다.
▸ 끝이 있기에 오늘의 선택과 관계가 무게를 얻습니다.
🔑 로고테라피
고통을 없애기보다 고통 속에서 의미를 찾는 데 무게를 두는 프랭클의 치료법
마음의 자유와 책임
철학과 과학의 탐구를 넘어,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물음은 "마음을 어떻게 살 것인가"입니다. 뇌와 마음에 대해 아무리 많이 안다 해도, 우리는 매 순간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그 선택의 주체는 누구일까요? 실존주의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는 인간이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선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택하지 않는 것조차 하나의 선택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에 우리는 책임을 집니다. 「뷰티풀 마인드」에서 내시는 환각에 반응하지 않기로 선택합니다. 뇌과학의 눈으로는 그의 뇌 상태가 그 선택을 빚었다 할 수 있지만, 내시의 자리에서 그것은 분명 그의 선택이었고, 그는 자기 삶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였습니다.
사르트르는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했습니다. 인간에게는 미리 정해진 본질이 없으며, 우리는 먼저 존재한 뒤 스스로 자신이 무엇인지를 만들어 간다는 것입니다. 「인사이드 아웃」에서 성격의 섬이 무너졌다 다시 서는 장면은 이 실존적 진실의 은유입니다. 이 말은 무겁지만 동시에 자유의 선언이기도 합니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라는 말은 절반만 맞습니다.
지금의 나는 지나온 선택들이 쌓인 결과이지만, 앞으로의 나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고 지금부터의 선택이 빚어 갈 것입니다. 뇌가 변할 수 있다는 신경가소성의 과학이, 인간이 스스로를 새로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실존주의의 통찰과 여기서 손을 맞잡습니다. 과학과 철학이 서로 다른 길을 걸어 같은 자리에 닿은 셈입니다.
고통의 의미와 수용
「인사이드 아웃」의 핵심 메시지 가운데 하나는 부정적 감정의 값어치입니다. 기쁨은 처음에 슬픔을 밀어내려 하지만, 슬픔 없이는 진정한 기쁨도 깊은 연결도 없음을 깨닫습니다.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뒤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인간이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증언했습니다. 그가 즐겨 인용한 니체의 말대로,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뎌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로고테라피'는 고통을 없애려 하기보다 고통 속에서 의미를 찾는 데 무게를 둡니다. 슬픔은 한낱 나쁜 감정이 아니라 우리에게 무엇이 소중한지를 일러 주고, 타인의 공감을 부르며, 깊은 성찰의 문을 엽니다.
「뷰티풀 마인드」의 내시도 정신질환이라는 고통을 지나 더 깊은 통찰에 이릅니다. 평생 논리를 좇던 수학자가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 말하는 그 통찰은, 그의 고통 없이는 닿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고통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고통은 여전히 고통입니다. 다만 같은 고통을 겪어도, 그 안에서 의미를 찾는 사람과 의미 없이 휩쓸리는 사람의 삶은 달라집니다.
시험에 실패한 경험, 친구와 멀어진 경험, 오래 앓은 마음의 상처.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를 바랄 수는 있어도, 이미 일어난 일이라면 거기서 무엇을 배울지는 우리가 정할 수 있습니다. 슬픔을 억지로 지우려 애쓰는 대신 "나는 지금 무언가 소중한 것을 잃어 슬프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고통을 의미로 바꾸는 첫걸음입니다.
마음챙김과 현재의 순간
동양 철학, 특히 불교는 마음에 독특한 빛을 비춥니다. 불교의 핵심 통찰 가운데 하나는 고통이 집착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쾌락에 매달리고 고통을 밀어내려 하는데, 그 집착 자체가 더 큰 고통을 빚습니다. 불교의 '마음챙김'은 지금 이 순간에 판단 없이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생각과 감정이 일어나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되 거기 휩쓸리거나 매달리지 않습니다. 이것은 내시가 환각을 대하는 방식과 닮았습니다. 그는 환각이 보여도 반응하지 않습니다. 바라보되 매달리지 않는 것입니다. 현대 심리학의 '수용 전념 치료'는 이 원리를 치료에 옮깁니다.
불쾌한 생각과 싸워 없애려 하기보다 그것을 받아들이면서도 가치 있는 행동을 택하는 것입니다. 라일리가 슬픔을 받아들이는 것도, 내시가 환각과 공존하는 법을 배우는 것도 바로 이 수용과 전념입니다.
시험 불안이 밀려올 때 그것을 억지로 누르려 할수록 더 커지지만, "지금 나는 긴장하고 있구나" 하고 인정하고 나서 해야 할 공부로 돌아가면 불안은 한결 가벼워집니다. 생각과 감정은 날씨와 같아서, 맞서 싸울 대상이 아니라 지나가도록 지켜볼 대상입니다. 먹구름이 끼었다고 하늘을 미워할 필요가 없듯이, 어두운 감정이 찾아왔다고 자신을 미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연결과 관계의 의미
마음에 대한 모든 탐구는 끝내 관계의 중요성으로 돌아옵니다. 우리의 마음은 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음은 다른 마음과의 관계 속에서 빚어지고 변하고 치유됩니다. 소아과 의사이자 정신분석가였던 도널드 위니콧은 "홀로 존재하는 아기 같은 것은 없다"고 했습니다. 아기는 늘 돌봄의 관계 속에 있고, 그 초기 관계가 마음의 바탕을 놓습니다. 존 볼비의 애착 이론에 따르면 유아기의 안정적 애착이 평생의 정서 조절과 관계 능력의 토대가 됩니다. 「인사이드 아웃」에서 라일리의 위기는 관계의 단절에서 시작되고, 그 회복은 부모와의 연결을 되찾는 데서 시작됩니다.
「뷰티풀 마인드」에서 내시의 회복에 앨리샤의 사랑이 결정적이었던 것도 같은 이야기입니다. 약물도 치료법도 의지도 중요하지만, 끝내 그를 떠받친 것은 인간적 연결이었습니다. 이것은 거울뉴런의 신경과학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비추며 살아가도록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그러니 힘들 때 혼자 버티는 것이 강한 것이 아닙니다. 손을 내밀어 누군가와 이어지는 것이야말로, 마음이 본래 작동하도록 설계된 방식입니다. 자기 방에 혼자 틀어박혀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하려는 태도가 도리어 마음을 더 위태롭게 만드는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죽음과 유한성, 그리고 의미의 창조
마음에 대한 실존적 성찰은 끝내 죽음과 유한성에 가닿습니다.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인간을 '죽음을 향한 존재'로 정의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유한함을 아는 유일한 존재이고, 그 앎이 삶에 긴박함과 의미를 줍니다. 무한히 산다면 모든 것을 '나중에'로 미룰 수 있지만, 죽음이 확실하기에 지금 이 순간이 소중해집니다. 영화 속 실제 인물 존 내시는 2015년 아내 앨리샤와 함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뛰어난 마음과 모든 통찰과 사랑의 경험은 이제 어디에 있을까요? 물리적으로 그의 뇌는 더 이상 활동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이디어는 게임 이론에 살아 있고, 그의 이야기는 영화로 책으로 사람들에게 가닿습니다. 마음의 '영향'은 물리적 죽음을 넘어 이어집니다. 죽음이라는 말이 청소년에게는 아직 멀게 느껴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끝이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지금 이 순간을 소중하게 만듭니다. 무한히 살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나중에'로 미뤄도 됩니다.
끝이 있기에 오늘의 선택과 오늘의 관계가 무게를 얻습니다. 유한함을 아는 것은 우리를 짓누르는 짐이 아니라, 도리어 삶을 또렷하게 만드는 빛인지도 모릅니다. 알베르 카뮈는 삶의 부조리를 인정하면서도 그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삶을 긍정하라고 말했습니다. 의미는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되는 것입니다. 「인사이드 아웃」은 의미의 한 원천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감정입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소중히 여기기에 슬퍼하고 사랑하기에 기뻐합니다.
감정이 세계에 의미를 입힙니다. 완전히 무감정한 존재에게 세계는 그저 중립적인 사실의 더미일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언가에 슬퍼하거나 분노한다는 것은, 그만큼 소중히 여기는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무엇에도 마음이 일렁이지 않는 삶이 편할 것 같지만, 그것은 의미가 빠져나간 삶이기도 합니다. 마음이 흔들린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이며, 그 흔들림이 향하는 곳에 우리가 진짜로 소중히 여기는 것이 숨어 있습니다.
🤔 핵심 질문
고통을 없앨 수 없을 때, 나는 그 고통에 어떤 의미를 줄 수 있는가?
CHAPTER 07
💭 다섯 창문을 우리들의 일상으로
📌 이 장의 핵심
▸ 다섯 창문의 이론은 사회관계망·추천 알고리즘·시험·진로 같은 하루 속에서 실제로 작동합니다.
▸ 기계가 답을 잘할수록 좋은 질문을 던지고 답을 의심할 줄 아는 사람이 귀해집니다.
이 다섯 관점은 교과서 속 이론으로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하루 속에서 실제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철학의 창부터 보겠습니다. 데카르트가 던진 "내가 보는 것이 진짜인가"라는 의심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사회관계망에 올라온 친구의 행복한 사진을 보며 '저 애의 삶은 완벽하구나' 하고 믿을 때, 우리는 잘 편집된 한 장면을 현실 전체로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안다'고 여기는 많은 것이 사실은 부분을 보고 전체를 추측한 결과입니다. 한 번쯤 "내가 지금 확신하는 이것이 정말 사실일까" 하고 의심해 보는 습관, 그것이 곧 철학하는 일상입니다.
뇌과학의 창은 더 가깝습니다. 예측 코딩 이론에 따르면 뇌는 끊임없이 다음을 예측하고 추천 알고리즘은 그 예측을 부추깁니다. 짧은 영상을 한 편 보면 비슷한 영상이 끝없이 따라붙고, 우리의 뇌는 '다음에 올 자극'을 기대하며 손가락을 멈추지 못합니다. 알고리즘이 우리의 예측 회로를 길들이는 셈입니다. 한편 신경가소성은 시험 공부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반복해서 익힌 것이 신경 회로로 굳는다는 사실은, 벼락치기보다 꾸준한 반복이 왜 더 오래 가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뇌는 우리가 자주 쓰는 길을 넓혀 줍니다.
심리학의 창은 감정의 일상으로 이어집니다. 감정의 구성 이론은 시험 직전의 두근거림을 '불안'이 아니라 '내가 준비됐다는 몸의 신호'로 다시 읽도록 도와줍니다. 같은 몸 상태라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것은 나를 무너뜨리는 불안이 되기도, 나를 깨우는 각성이 되기도 합니다. 다마지오의 통찰은 진로를 고민할 때 빛납니다. 머리로만 따지면 끝없이 저울질만 하게 되지만, '이 일을 떠올릴 때 마음이 설레는가'라는 감정의 신호가 결정을 도와줍니다. 감정은 결정의 방해꾼이 아니라 나침반입니다.
인공지능의 창은 이미 여러분의 손안에 있습니다. 숙제를 인공지능에게 맡기면 답은 빠르게 돌아옵니다. 그러나 한 번도 스스로 따져 본 적 없는 사람은 그 답이 틀렸을 때 틀린 줄도 모릅니다. 기계가 답을 잘할수록, 도리어 좋은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의심할 줄 아는 사람이 더 귀해집니다. 그리고 외로울 때 인공지능과 나누는 대화가 위로가 될 수는 있어도, '다른 사람이 나를 이해해 준다'는 그 특별한 경험을 온전히 대신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열린 물음입니다.
실존의 창은 가장 묵직하게 다가옵니다. 사르트르의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는 말은, 진로든 관계든 어떤 선택도 끝내 내 몫이라는 뜻입니다. 미루는 것조차 하나의 선택입니다. 프랭클의 통찰은 힘든 시기를 지날 때 손을 내밉니다. 고통 자체를 없앨 수 없을 때에도, 그 고통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는 우리가 정할 수 있습니다. 슬픔이 찾아온 날 그것을 억지로 밀어내는 대신 "지금 나는 무언가 소중한 것을 잃어 슬프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마음을 살아 내는 한 가지 방식입니다.
CHAPTER 08
📌 종합 · 다섯 창문을 모아 보면
📌 이 장의 핵심
▸ 마음은 뇌에 깊이 기대어 있지만 뇌로 다 환원되지는 않습니다.
▸ 고정된 나는 없을지 몰라도, 끊임없이 다시 빚어지는 그 과정이 곧 나입니다.
다섯 개의 창문으로 같은 방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철학의 창은 마음과 뇌가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를 따져 물었고, 뇌과학의 창은 마음이 어떤 물질적 바탕 위에 서 있는지를 보여 주었으며, 심리학의 창은 그 마음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인공지능의 창은 마음이 과연 인간만의 것인지를, 실존의 창은 그 마음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비추었습니다.
다섯 빛이 한자리에 모이면 한 가지 그림이 떠오릅니다. 마음은 뇌에 깊이 기대어 있지만 뇌로 다 환원되지는 않으며, 그 사이에 난 틈에서 인간은 자신을 들여다보고 다시 빚어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그림은 우리를 처음의 다섯 물음으로 데려갑니다. 나는 뇌인가? 뇌에 깊이 기대어 있으나 뇌가 곧 나는 아닙니다.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두개골 안에 갇혀 있지 않고 몸과 세계와 관계 속으로 번져 있습니다. 내 선택은 자유로운가?
뇌가 앞서 움직이더라도 멈춰 세우고 다시 방향을 잡는 자리에 자유가 남아 있습니다. 기계도 마음을 가질 수 있는가? 아직 누구도 확언하지 못하며, 그 답은 마음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변하는 뇌 속에 변치 않는 나가 있는가? 고정된 나는 없을지 몰라도, 끊임없이 다시 빚어지는 그 과정이 곧 나입니다.
CHAPTER 09
❓ 마무리 · 열린 물음들과 일곱 가지 통찰
📌 이 장의 핵심
▸ 마음에 대한 물음에 최종 답은 없지만, 물음과 씨름하는 것 자체가 인간다움의 핵심입니다.
▸ 일곱 가지 통찰로 뇌와 마음, 감정, 관계, 의미의 자리를 정리합니다.
이 탐구는 결론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마음에 대한 물음에 최종 답은 없으며, 어쩌면 영원히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답이 없다는 것이 탐구의 실패는 아닙니다. 물음 자체와 씨름하는 것이 인간다움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인사이드 아웃」에서 기쁨은 "슬픔이, 너는 왜 있는 거지?"라고 묻고, 영화 끝에서 그 답을 찾습니다.
슬픔은 우리가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지 일러 주고, 도움을 청하게 하며, 깊은 연결을 가능하게 합니다. 「뷰티풀 마인드」에서 내시는 평생 논리를 좇았지만 끝내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 말합니다. 마음은 논리로 다 잡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음의 실패가 아니라 마음의 신비입니다. 이 단원에서 손에 쥐고 갈 일곱 가지를 적어 두겠습니다.
하나. 마음과 뇌는 떼어 낼 수 없습니다. 뇌의 변화가 마음을 바꾸고, 마음의 활동이 뇌를 바꿉니다. 내시의 환각이 약으로 조절되었듯, 마음의 경험에는 물질적 바탕이 있습니다.
둘. 그러나 마음은 뇌로 다 환원되지 않습니다. 의식의 어려운 문제가 보여 주듯, 왜 뇌 활동에 '느낌'이 따라붙는지는 여전히 신비입니다. 뉴런의 발화를 아무리 정밀하게 그려도 '빨갛게 보이는 느낌'이 왜 존재하는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셋. 모든 감정에는 제 몫이 있습니다. 기쁨만이 좋은 감정이 아닙니다. 슬픔은 연결을, 분노는 경계를, 두려움은 안전을 지킵니다. 감정을 억누르기보다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건강한 마음의 길입니다.
넷. 뇌는 예측 기계입니다. 우리가 겪는 현실은 바깥 세계의 복사가 아니라 뇌가 빚은 최선의 추측입니다. 이 눈으로 보면 환각과 평범한 지각의 차이는 본질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확신 앞에서도 겸손해야 합니다.
다섯. 신경가소성은 희망입니다. 뇌는 굳어 있지 않고 변합니다. 새 경험과 배움과 연습이 뇌의 구조를 바꿉니다. 우리는 상처에서 회복할 수 있고 새 습관을 들일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여섯. 마음은 관계 속에서 빚어지고 치유됩니다. 우리의 마음은 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연결과 사랑과 공감이 마음 건강의 핵심입니다. 내시의 회복에 앨리샤의 사랑이 결정적이었던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일곱. 의미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입니다. 프랭클이 극한의 고통 속에서 찾아냈듯, 삶의 의미는 바깥에서 주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선택하고 창조합니다. 이것은 무거운 책임이자 놀라운 자유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무엇을 생각하나요? 마음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나요, 아니면 도리어 더 많은 물음이 생겼나요? 물음이 생겼다면 그것은 좋은 신호입니다. 철학의 시작은 경이로움이고, 마음만큼 가까우면서도 신비로운 것은 없습니다. 매 순간 우리는 마음을 통해 세상을 겪지만, 마음 그 자체는 끝내 다 파악되지 않습니다. 그 신비를 껴안으며, 계속 물어 가시기 바랍니다.
✅ 오늘의 정리
마음과 뇌는 떼어 낼 수 없지만, 마음은 뇌로 다 환원되지 않을 수 있다.
뇌는 현실을 받아 적지 않고 예측해 빚으므로, 자기 확신 앞에서도 겸손해야 한다.
신경가소성은 우리가 변할 수 있다는 과학적 희망이다.
감정은 이성의 적이 아니라 나침반이며, 마음은 관계 속에서 치유된다.
의미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고 창조하는 것이다.
📌·🔑·💡·🤔·✅ 표시 상자는 이해를 돕기 위한 편집 요약입니다. 본문은 원문 전문 그대로입니다.